PEOPLE

뇌에 힘준다고 우울이 낫지 않아요

우울은 나약해서도, 의지의 문제도 아니에요.

오지은 싱어송라이터&작가

플레이라이프 독자들에게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음악하는 걸로 일을 시작했고, 글 쓰는 일도 하는 오지은입니다.



최근 전주로 이주하셨다고요. 이곳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요.

서울과 수도권을 떠나고 싶었어요. 홍대에서 파주로 이사할 때는 좀 더 한적한 곳을, 이번에는 마음 편하게 혼자 살만한 곳을 찾으려 했어요. 프리랜서이고 주로 집에서 일하다 보니 지방도 괜찮겠다 싶었죠. 베를린, 치앙마이에서 한 달 살기하는 것처럼, 제가 어딘가에 장기 체류를 한다고 생각해 봤어요. 일단, 고향인 경상도는 제외! 가족과는 적당히 물리적인 거리감이 필요하니까요(웃음). 충청도는 대전이 끌렸는데, 교육열이 높아서 그런지 집 값이 비쌌어요. 저는 강아지랑 고양이를 키우기 때문에 사교육이 필요 없거든요. 강원도는 바다가 가까운 곳이 좋았는데 비수기에 쓸쓸할 것 같아서 제외, 마지막으로 전라도를 들여다봤어요. ‘밥이 맛있는 곳에 살면 좋겠다’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전주천의 매력을 알게 됐어요. 부동산 사이트를 열고 적당한 매물을 확인한 뒤 지금의 집으로 이주했어요. 그렇게 연고도, 친구도 없는 전주에서 살기 시작했어요.



전주라이프는 생각한 대로 만족하시나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를 보러 갔을 때, 동네 주민분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태권도복을 입고 피카츄 돈가스를 든 아이가 내뿜는 에너지, 강아지를 산책할 때 말을 걸어오시는 주민분들의 다정한 오지랖이 좋았죠. 1년 넘게 살아보니, ‘계획도시가 아닌 마을’은 이런 분위기구나 하고 알겠더라고요. 양지바르고, 사람보다 초록의 밀도가 높은 곳에 살다 보니 눅눅한 저도 조금 보송해지는 것 같아요.

문턱을 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최근 「우울증 가이드북」을 출간하셨어요. 11년 차 환자가 작성한 우울증 설명서라니, 끝판왕 같은 느낌인데요! 이 책을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2014년부터 우울증으로 병원에 다녔거든요. 당시에는 우울 증세가 있어도 병원에 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가보니 어떤지’, ‘약은 먹어보니 효과가 있는지’ 등 비슷한 질문을 오랫동안 받았죠. 제 이야기를 듣고 병원에 갔다는 친구의 말을 듣기도 해서, 그동안 받은 질문이랑 제 나름의 답을 모아 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울증 환자한테는 긴 호흡의 종이책을 읽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 우선 인터넷으로 연재를 시작했어요. 하다 보니 출판사에서 출간 제의를 주셔서 책으로 선보이게 됐어요. 공동 저자인 반유화 선생님께서 의사의 관점에서 현실적인 조언을 작성해 주셔서 책의 완성도가 높아졌어요. 평소 선생님의 따듯한 글을 좋아해서, 대담을 진행할 때는 선물 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어요!



가이드북을 낸다는 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시행착오를 덜 겪기를 바라는 마음이잖아요. 잘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 같아요. 어떤 부분을 가장 신경 쓰셨나요?

이 책은 ‘음악하고 글 쓰는 오지은’보다 ‘우울증 11년 차 환자’의 입장에서 작성했어요. 우울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거니까, 제 경험담이 예술가의 우울처럼 느껴지지 않길 바랐거든요. 그리고, 우울증을 스스로 의심하는 단계인 분들이 병원의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돕고 싶었어요. 치료 과정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치료를 중단하는 분들이 많아요. 의사와 소통하는 방법이라든지, 약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들. 저 역시 겪었던 부분을 목차로 구성했고, 최대한 직관적이고 대중적인 언어로 전달하고자 했어요.

대중에게 알려져 있다 보니, 우울증 관련 질문이나 고민 상담을 많이 받으실 것 같아요.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어떤 것들인가요?

병원에 갈지 말지 고민인 분들이 DM을 보내시기도 하는데요. 저를 좋아해 주시는 분들의 성향상 본인 얘기를 하는 걸 민폐라고 생각하세요. 그보다는 병원에 다녀온 소감을 편지에 써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용기를 얻어서 도움을 받았다는 말을 전해주실 때면 평소에 치료 경험이나 병원 방문을 적극적으로 권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해요.



책에서 ‘뇌에 아무리 힘을 줘도 정병은 낫지 않는다’라는 대목이 인상 깊었어요. 여전히 우울증을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잖아요. 지은 님도 뇌에 힘을 주려고 애쓰던 시절이 있었나요?

한국 사람들은 앓는 소리를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하잖아요. 남 앞에서 울면 나약한 거고, 못 하겠다는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고. 1.5인분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크죠. 그런데, 0.5를 더 하려면 어딘가에서 나를 깎아서 써야 하거든요. 타이어가 마모된 상태에서 내가 마음을 굳게 먹는다고 타이어가 다시 튼튼해지지 않잖아요. 멈추고 재정비해야죠.

저도 뇌에 힘을 주려 애쓰던 시절이 있었어요. 인디 뮤지션에게는 다음 앨범이나 작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요. 사람들의 기대가 너무 커도 심리적인 압박을 받고요. “앨범을 내면 듣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왜 작업을 안 해? 앓는 소리하지 말고 해야지”라는 생각이 저를 괴롭혔어요. 저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스스로가 악플러가 되어 계속 다그쳤죠. “너 어제 놀았잖아, 한다고 해놓고 안 했잖아”라는 생각에 우울 증상이 점점 심해졌어요. 밤에 잠을 못 자는 건 물론이고, 언어 능력이 퇴화하는 게 느껴졌어요. 가사 쓰고 글 쓰는 사람인데, 어떤 날은 노트북을 7시간 노려만 보고 있었죠. “아, 이게 내 의지의 문제가 아니고 그냥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거구나”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어요.



우울감이 예술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본인이 가진 고유한 성격이 나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 정확히 알기는 쉽지 않아요. 예민한 성격이 곡 쓸 때는 장점인데, 일상에서는 단점일 수 있잖아요. 치료하면 예술적인 에너지가 깎이지 않을까 하는 공포를 가진 동료가 많았고, 저도 그랬어요. 그런데 우울이라는 게 성냥개비에 붙인 불 같은 게 아니더라고요. 후후 불어서 꺼질 일이었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지 않겠죠.

나아가기 위한 물러서기

상담 중에 창작을 중단할 것을 권유받았다고요. 우울증을 치료하고 싶은 이유 중 하나가 창작 작업을 하기 위해서일 텐데, 치료를 위해 창작을 그만하라니, 무력감에 빠졌을 것 같아요.

“혹시 내 직업을 일이 아니라 노는 거로 생각하나?”라는 반감이 들었죠. 근데 다른 선생님께서도 일단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행위, 씻고 먹고 자는 게 가능한 상태를 만든 뒤에 기력이 생기면 작업을 할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자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결국, 음악을 잠깐 관두는 게 치료에 필요했어요. 불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화상을 입잖아요. 때론 적정 거리까지 뒤로 물러서야 해요. 지금은 우울과 함께 살아가는 요령이나 자신감이 많이 생겼고, 다시 작업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가사도 조금씩 쓰고 있어요.



프리랜서나 창작자들은 스스로 일을 만들어야 하고 일정을 관리해야 하잖아요. 우울증을 겪으면서 해내기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아요.

우울증 환자가 항상 부정적인 건 아니거든요? 한없이 긍정적일 때도 있어요. 문제는 그럴 때 일이 들어오면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승낙을 해버린다는 거예요! 한 해에 두 개의 매체에 장기 연재를 한 적이 있는데요. 매번 마감 지키기가 어려워서 죽을죄를 지었다는 이메일을 써야 했어요.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렇게 무리했기 때문에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었어요. 쉴 때 우울의 소용돌이에 빠져버리면 아주 어려운 영역까지 갈 수 있거든요.



음악하고 글쓰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나요?

제게 좋은 일이 생기면 그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좋은 얘기를 해도 “내 앞이니까 그냥 하는 말이겠지, 작은 걸 확대해서 얘기하는 거야”하고 말이죠. 팬분들이 계속 아니라고 해도 안 믿었죠. 이게 우울의 증상인 것도 상담하면서 알게 된 거지, 그전에는 몰랐어요. 데뷔 15년 차가 됐을 무렵인가, 한 팬 분이 “10년 넘게 정규 앨범을 내지 않는데, 지금 당신의 음악을 듣는다는 게 어떤 의미겠어요”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동안 음악으로 뭘 전해온 건지 인지한 순간이었어요. 음악하고 글 쓴 덕분에 빠져나오지 못할 구덩이까지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우울을 다스리면서 살아가기

우울의 터널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나를 지키는 일상’이 있나요?

루틴이 없는 편이라, 의사 선생님들이 루틴 만들기를 권하셨는데요. 강제로 하나 생긴 게 흑당이(반려견)와의 산책이에요. 흑당이가 실외 배변만 해서, 아침저녁 무조건 두 번 나가야 하거든요. 굉장히 지쳐 있는 날도, 산책하러 나가자고 신호 보내는 흑당이를 보면 일어나요. 한번 나가면 30분은 있다가 들어오기 때문에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경우가 많아요.



견주와 집사는 강제로 건강해진다는 말도 있잖아요.

가사 쓰고 글 쓰는 일 모두 언어적인 작업이고, 친구를 만나도 말을 많이 하는 편이라 돌아와서 자책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 말은 하지 말 걸, 조금 덜 말할 걸”하고 말이죠. 반면, 반려동물과의 비언어적 소통은 자책 없는 사랑으로 느껴져요. 그렇다고, 우울증에 도움을 받고자 반려견이나 반려묘가 키우는 것은 위험할 수 있어요. 책임져야 할 대상이 생기는 거니까요.



무기력할 때 잔잔한 드라마를 본다고요, 최근에 재미있게 보거나 추천해주고 싶은 콘텐츠가 있나요?

최신 콘텐츠는 아니지만,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라는 일본 드라마를 추천해요. 여주의 똑 부러지는 성격이나 친구들을 방에 불러 시간을 보내는 장면도 좋고요. 인생의 즐거움을 옷 입기로 표현하는데, 그게 또 약간 촌스럽거든요? 편집부에서 일하는 다른 동료들은 무채색으로 출근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 사이를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누비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웠어요. 무엇보다, 이 드라마에는 숨겨진 반전 같은 게 없어서 좋았어요. 무기력할 때는 이런 직관적이고 사이다 같은 콘텐츠를 보세요!

우울증을 잘 다스리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병을 부정하던 시간이 아까워요. 좀 더 빨리 인지하고 상담받았다면 치료가 복잡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저는 스스로를 파악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거든요. 여러분들은 사회와 전문가들이 만들어둔 시스템을 잘 활용했으면 해요. 우울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니 병원에 간다고 나약해지는 게 아니고, 스스로를 제대로 마주하는 용기 있는 일이니까요.

상담비가 부담된다면, 국가에서 운영하는 상담 지원 프로그램을 신청해 보세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이번 기회에 언급하고 싶어요! 저는 보건복지부가 주관하는 ‘전국민 마음투자 지원사업’을 신청해 상담비를 지원받고 있어요. 신청하면 심리 상담 바우처를 제공해 주거든요. 지자체, 재단 등 생각보다 다양한 마음 건강 지원사업이 있으니 꼭 검색해 보세요.



마지막으로, 지은 님에게 ‘마음 성장’이란 무엇인가요?

‘나를 똑바로 바라볼 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증상과 저를 한 덩어리로 생각했어요. 잠을 못 자고, 마감을 못 지키고, 약속에 늦고, 말을 똑바로 못하는 것에 좌절하고 한심하다고 생각했죠. 이제는 열이 나면 해열제로 열을 내리는 것처럼 우울증도 치료로 완화할 수 있는 증상이라는 걸 알아요. 여전히 증세가 나빠지기도 하지만, 자학하며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아요.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자신을 마주하는 용기를 내셔서, 조금이라도 편안해지시길 바라요.

일 잘 하는 사람은 나를 위해 일해요

“이 일을 어떻게 할지보다 왜 해야 하는지 생각하려고 노력해요.”

강지연 작가

지칠 땐 잠시 바닥에 머물러 보세요

"잠시 쉬고 나를 가만히 두면 뭔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다시 올라와요.”

김유진 심리 스타트업 ‘마인드웨이’ 대표

영원히 반복되는 고난은 없다

“저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게 제가 사회에 진 빚이라는 걸 알았죠.”

김혜민 라디오 PD

기록은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다정한 안부

“기록이 진해질수록 허무함은 희미해져요”

김신지 에세이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