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런 기분이 들까요?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 남긴 깊은 상처
정복 님에게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있었지만 동시에 부모님(특히 어머니)에 대한 깊은 원망이 함께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존재할 때, 우리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더 강하게 비난하게 되지요. ‘사랑하는데 왜 못 갔지?, 나는 나쁜 딸인가?’라는 자기 비난, 그리고 ‘그때 갔어야 했는데. 용서의 말 한마디를 했어야 했는데’와 같은 후회와 죄책감이 더해져 소화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아버지의 죽음이 준비된 이별이 아니라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정복 님의 마음에 새겨진 상처가 더욱 깊을 것 같아요. 원망과 용서의 대상이 하루 아침에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아버지에게 마지막 말을 전하지 못한 채로 ‘끝맺음이 없는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기 때문에 자책과 무력감을 함께 경험하게 되겠지요. 충분히 원망하지도, 충분히 용서하지도, 충분히 애도하지도 못한 채 맞이한 상실이니까요.
안전해야 할 관계에서 반복된 관계적 상처
본래 심리상담은 힘든 상황에서 ‘안전하게 이해 받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복 님은 두 번의 심리상담을 통해 오히려 그 반대를 경험하신 것 같아요. 의지했던 관계에서 오히려 상처를 받고 거절당하는, 안전하기는 커녕 오히려 위협적인 관계가 반복된 것이지요. 특히 부모와의 관계에서 경험한 상처가, 상담자와의 관계에서 재경험되었기 때문에 더 큰 고립감과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상담자의 잦은 일정 변경과 지각, 부정적인 감정을 타당화 및 수용 받지 못한 경험, 용기내 상처 받은 마음을 이야기했을 때 공감 없이 해석과 직면을 제시 받은 경험, 도움 요청이 거절된 경험들은 심리적으로 ‘버려짐’이나 ‘무시당함’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감정은 아버지에 대한 감정 뿐 아니라, 상담 경험에서의 실망과 분노까지 함께 포함된 상태로 느껴집니다.
표현되지 못한 마음은 쌓이고 쌓여 고통을 만든다
정복 님은 평소에도 자신의 속마음이나 요구를 직접 표현하기보다는 참고 견디는 방식에 더 익숙하신 분으로 보입니다. 상대에게 상처를 줄까 봐, 혹은 관계가 더 어려워질까 봐 중요한 순간에도 말을 아끼고 혼자 감당해오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성향은 갈등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감정과 필요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채 마음 속에 쌓아두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부모님과의 관계, 그리고 상담 장면에서도 반복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고 싶었던 말, 요청하고 싶었던 도움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채로 그 마음이 쌓이면, 원망이나 분노, 또는 자책이나 자기 비난으로 전환되기도 합니다. 극심한 두통 또한 이러한 마음 속 고통이 신체화로 나타나는 모양이지요. 이는 가족 내 갈등 속에서 정복 님이 발달시켜 온 생존 방식이기도 할 테지만, 이제는 심리적, 신체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대처방법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멈춰 있던 애도를 다시 흐르게 하기
가장 먼저 정복 님에게 필요한 것은 ‘잘못을 따지는 과정’이 아니라 ‘애도를 완성해가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지금의 마음은 단순한 슬픔을 넘어, 사랑, 원망, 죄책감, 그리움 등이 뒤섞인 복합적인 애도의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런 감정들이 충분히 흘러가지 못하고 자책에만 묶이게 되면, 애도가 멈춘 채 고통만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무엇이 옳았는지 판단하기보다, 감정들을 하나씩 다시 꺼내어 있는 그대로 경험해보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지 못했던 것들에 집중하기보다, 그 안에 담겨 있었던 소중한 마음을 천천히 꺼내어 표현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아버지께 잘해드리고 싶었던 마음, 더 사랑하고 용서하고 싶었던 마음을 편지에 부쳐보거나, 그 때 전하지 못한 말을 글로 정리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원망하는 마음도 결국 사랑하고 싶기 때문에 생겨나는 마음이기 때문이지요. 애도는 ‘잊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일. 그리고 계속 연결되는 일’입니다.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그리워하고, 때로는 화나 원망까지도 솔직하게 느끼며 자연스럽게 오가도록 허용해주세요. 그리고 나면, 지금의 눈물과 고통이 아버지를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증표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안전한 관계 속에서 회복하기
정복 님에게는 안전하게 연결될 수 있는 새로운 대상 관계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설명이나 이해로 회복되기보다, 실제 관계 안에서의 경험을 통해 회복됩니다. 얄롬(Yalom)의 말처럼, ‘치유하는 것은 관계’이기 때문이지요. 특히 부모님과의 관계에서의 상처에 더해, 상담 장면 안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한 상처는 ‘관계 안에서 받은 상처’이기 때문에 새로운 관계적 경험이 필요합니다.
기존 상담센터로 돌아가 힘들었던 점을 이야기하고 마음 속 앙금을 해결하는 것이나 지난 관계 내에서 갈등을 풀어내보는 경험도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이는 관계가 안전할 때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연을 통해 본 관계는 그리 안전해 보이지 않지요. 정복 님에게 잘 맞는 상담사를 찾아 안전한 관계 속에서 먼저 부정적인 감정도 충분히 수용 받고 공감 받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스스로를 이해하고, 아버지에 대해 애도하며, 관계적 갈등을 해결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상담사를 찾을 때 이전 상담에서의 상처를 반복하지 않도록 ‘이 관계에서 내가 안전한가’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두어 보세요. 심리상담은 나의 깊은 이야기를 편안하게 꺼낼 수 있어야 하는 관계이지, 견디고 버텨야 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표현하지 못한 감정을 밖으로 꺼내기
지금까지 정복 님의 감정이나 필요를 밖으로 드러내기보다 참고 견디는 방식으로 버텨오셨다면, 이제는 오랫동안 쌓여 온 표현되지 못한 감정들을 밖으로 꺼내 보면 좋겠습니다. 꼭 누군가에게 직접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글로 감정을 풀어내거나 ‘나는 지금 너무 슬퍼. 너무 화가 나네.’처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이름 붙여주는 것부터 시작해 보세요. 그리고 ‘내가 정말 화가 날 만해.’와 같이 감정을 스스로 타당화해주면, 긴장이 풀어지고 두통과 같은 신체 증상이 완화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표현은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지키고 회복시키며, 관계를 건강하게 이어 나가는 요소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혼자 감당해온 시간이 길었던 만큼, 이 연습은 아주 작은 단위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방식 안에서 천천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따뜻하고 안전한 관계 내에서 이루어진다면 더 좋겠고요. 그렇게 막힌 감정이 조금씩 흐르기 시작할 때, 마음의 고통 뿐 아니라 몸의 긴장도 함께 완화되는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 거예요.
아버지의 마지막을 충분히 함께하지 못했다는 마음, 어머니와의 갈등 속에서 버티며 해결하려고 노력해 온 시간, 그리고 상담 장면에서의 상처까지. 이 모든 경험이 연결되어 정복 님의 고통에 이어져 있다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고통만큼 관계 안에서 애쓰고, 지키며, 사랑해 온 시간도 함께 느껴집니다. 아직 혼란스러우시겠지만, 천천히 마음을 풀어내며 한 걸음씩 나아가셔도 좋습니다. 무엇보다 안전한 방향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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