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 번 내뱉은 말과 다짐을 지키며 살아가려 합니다. 마음이 달라진 뒤에도 쉽게 뜻을 바꾸지 못하는 건, 과거의 나를 배신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배신이 오히려 오래 외면해온 진짜 마음을 마주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번 큐레이션은 『매일을 헤엄치는 법』의 저자이자 90만 유튜브 드로잉 크리에이터인 이연 작가와 함께, 스스로를 몇 번이고 배신하며 비로소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이야기를 들여다봅니다.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일을 선택하고, 변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마음을 뒤집으며 먼 길을 돌아 마침내 자신의 진심에 닿는 순간들. 글 사이사이에 담긴 이연 작가의 드로잉을 감상하며 천천히 따라가 보세요.
1. 나를 배신한 사람은 나였다
회원님을 위한 추천 스레드 :
아니, 내가 평소에 보던 ㅇㅇ이란 유튜버가 있는데 그 사람 좀 변했더라… 12시간 전
어느 날, 스레드에 나에 대한 글이 추천 게시물로 떴다. 마침 초성이 기가막히게 ㅇㅇ인 나는, 기어코 그 알림을 클릭하고야 말았다. 내용은 대강 예상했던 대로였다. 옛날에는 비혼주의라고 떠들고 다니더니, 이제는 결혼하고 출산까지 하는 게 참 보기 불편하다. 이 사람 감 잃지 않았냐. 이젠 보기 싫다 등등. 나에게 어떤 이유로든 실망과 배신을 느껴서 떠나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배신을 가장 먼저 당한 사람은 정작 나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나는 내가 한 말들을 거듭 어기며 살아왔다.
2. 첫 번째 배신, 그림
인생의 첫 번째 배신은 그림을 그리기로 다짐한 것이었다. 나는 늘 장래희망을 적는 칸에 피아니스트라 적었지만 끝내 미술을 하게 되었다. 모두들 알고 있었다. 쟤는 언젠가는 그림을 계속 그릴 애. 하지만 나만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면 영영 가난하게 살다가 죽을 것 같아서, 내가 처음 알게 된 화가가 반 고흐여서 그랬던 것 같다.
다짐은 생각보다 쉽게 허물어졌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가 미술학원을 다니게 되었다고 자랑을 한 게 화근이었다. 내가 쟤보다 그림 잘 그리는데, 나도 그림 배우고 싶은데… 하며 참을 수 없는 부러움에 거의 온몸이 아팠다. 며칠간 끙끙 앓다 간신히 용기내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미술학원 다니고 싶어요.’ 엄마는 왜 이제야 말했냐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그제야 반 고흐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도서관에 꽂힌 그에 대한 책을 열 권도 넘게 읽었다. 그리고 그의 문장 한줄을 마음에 깊이 새겼다. ‘나는 개가 될 것이고, 화가가 될 것이다.’
3. 두 번째 배신, 연애와 결혼
두 번째 배신은 연애와 결혼이다. 웃긴 게, 나는 정말로 결혼을 안 할 거라 떵떵거리고 다녔고, 심지어는 책에도 그렇게 썼다. 그 책의 이름은 『매일을 헤엄치는 법』으로, 내 저서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 이건 나도 예상 못했던 배신인 게, 나는 일기장에 절대로 결혼하지 말라고 결혼 하기만 해봐 하는 식으로 거의 저주처럼 써놓은 글이 있었는데 그걸 여태껏 기억하면서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이또한 예고된 배신이었다. 나는 언제나 사랑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는데, 내가 존경하는 작가들은 언제나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랑이 그림보다 중요할 수 있을까? 돈보다 중요할 수 있을까? 혹은 나보다 중요할 수 있을까? 이제는 대답할 수 있다. 전부 그렇다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야 사랑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사랑은 언제나 나를 감싸고 있었다. 전과 똑같다. 고흐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해놓고는 고흐처럼 살기로 다짐한 어느 어린 화가가 또 같은 짓을 한다. 그림이 나의 전부였던 것처럼, 사랑도 나의 전부였다. 이걸 인정하기까지는 더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이다.
4. 어떤 배신은 진심이 된다
어떤 다짐은 배신을 함으로써 비로소 숨겨져있던 진심을 알게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완성된다. 사랑하지 않기로 다짐한 사람은 사실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기에, 마침내는 사랑을 하고야 만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는 다짐한 사람은 사실 그걸 못 해낼 것 같아서 두려운 마음에 먼저 버린 척을 하지만, 기회가 온다면 누구보다 절박하게 붙잡고야 만다. 인간은 늘 이런 식으로 번복을 하며 제 길로 돌아간다. 처음부터 똑바로 걸어가면 편할 걸, 우리는 왜 그렇게 복잡하게 먼 길을 둘러가게 되는 걸까. 아마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오늘 어떤 만화를 보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마지막 2분 말이야, 앞 내용 다 떼놓고 저것부터 봤다면 난 안 울었을 거야. 하지만 그 앞단의 모든 이야기들을 봤기에 눈물이 나.’
우리의 배신도 그런 거다. 결말은 보면 단순하다. 지금은 이연이 그림을 그리고 있고, 결혼을 했다는 것. 하지만 이 단순한 현상에 닿는 과정은 쉽지 않고 지난한 에피소드들이 잔뜩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배신은 어찌보면 힘들게 먼 길을 돌아서야 깨닫게 된 고백이자 진심이다. 앞의 이야기를 아니 만화의 마지막 장면에 울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어떤 배신은 그렇게 하게 된다는 거다.
5. 그렇게 내게로 오는 길
스레드에 내게 실망감을 느낀 사람에게 이런 마음은 너무도 길어서 차마 남길 수 없다. 나는 영영 거기에 댓글을 달지 않겠지만, 달게 된다면 이런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나의 배신은 적어도 내 삶에서 만큼은 용기였다고. 내 모든 이야기를 알지 않는 사람은 눈물을 흘릴 수 없지만, 나는 내 이야기에 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당신도 너무 힘주어 말하며 무언가를 피하고 있다면, 사실 그게 당신이 꼭 해야하는 일이라는 걸 얘기해주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먼 길을 돌아서 그림으로, 사랑으로 왔다. 그리고 그 길은 당신도 멀리 돌아야만 하는 길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몇번이고 배신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를 저버렸을 때 당신은 진정한 자신에게 닿게 될 것이다. 그리고 최초의 거짓말도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말이었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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