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김송희의 마음 노트] 철없다고? 좀 아이스러워도 괜찮아

그저 벅차올라 별 이유 없이 웃음이 새어 나오고, 내일이 다가오는 것이 못 견디게 기쁘고 많은 상상과 가능성을 품고 있던 때를 다시 떠올려 보자.

김송희 <빅이슈 코리아> 편집장, 작가

‘김송희 작가의 철없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세요’라는 청탁서의 문구를 보고 뜨끔했다. 아니, 내가 철없이 사는 걸 이분이 어찌 아셨지? 만나본 적도 없는 담당 에디터가 나를 몰래 사찰한 것인가. 아니면 그저 원고 한 번 썼을 뿐인데, 지난 글에서(바이올린을 3년이나 배워놓고 연습 안 해서 제대로 할 줄 모른다거나, 마무리도 못 지으면서 시작만 잘한다는 등의 사례) 나의 철없는 태도가 느껴졌던 것인가. 사실 철딱서니 없기로는 어디 가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처지라 관련 에피소드를 풀어 달라는 청탁이 내심 반갑기도 했다.

 

어디 보자, 어디부터 썰을 풀어야 좋을까. 아니, 그런데 철이 없다는 정의가 뭐지? 우당탕탕 에피소드는 넘쳐 나는데… 방충망을 닦으려고 거실 창밖으로 나갔다가 문이 닫히는 바람에 창틀에 30분 동안 갇혀서 ‘살려달라’ 소리친 끝에 소방관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한 일? 벌레를 잡으려고 만든 퐁퐁 섞은 물을 다음 날 아침 모르고 내가 마신 일? 아니다. 이런 것들은 철이 없다기보다는 산만한 성격일 뿐이다.

 

그보다는 놀이터에서 덩치에도 안 맞는 그네에 올라타 신나게 발을 구르며 그네를 탄다거나, 3년간 모은 돈을 좋아하는 아이돌의 해외 원정 콘서트에 가느라 탕진하거나, 덕질하는 만화 캐릭터의 생일 카페를 개최하느라 철야하는 등(물론 이 모든 것을 제가 했다는 것은 아닙니다.)의 행동을 해야 ‘쯧쯧, 나잇값 못하고 철딱서니 없다’라는 부모님의 힐난을 들을 수 있겠다.

 

'철없는 것'이 아니고 '아이스럽고 싶은' 마음일 뿐

국어사전에 ‘철없다’를 검색해 보니 ‘철 없이’는 부사로 분류되며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함부로’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인 인식이나 사용 용례로는 어른스럽지 못하거나 나이에 맞지 않거나,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욕망을 참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사는 사람을 ‘철없다’고들 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어른스럽다’와 정확히 반대편에 병치되곤 하는 말이 ‘철없다’라는 셈인데 그보다는 더 순수하고 인간 본연의 모습에 가까운 마음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표현으로 ‘아이스럽다’라는 말이 있을 수도 있겠다.

 

아직 비혼이고 조카도 없는 탓에 어린아이를 자주 만날 일이 없는 나로선 아이를 만났을 때 어떤 대화를 이어 나갈지에 대해 무감한 편이다. 아이가 있는 친구들이 내 아이가 천재는 아닐지, 혹은 너무 기특하다며 자랑할 때를 비추어 보면 주로 ‘애가 나이에 안 맞게 이런 말을 하더라. 너무 신기하지’라며 이야기한다. 엄마가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을 때, 머리 위에 물수건을 슬쩍 갖다 준다거나 고사리 같은 손으로 딸기 따위를 씻어다 주는 어린아이의 행동에 부모는 ‘애가 어른스럽다’라며 감탄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너 참 어른스럽구나’라고 하는 말은 인격적 성숙에 대한 칭찬이 되지만, 어른에게 ‘너 참 애 같다’라는 말은 폄하의 발언이 되기 쉽다. 물론 요즘의 어른들은 되려 아이가 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지만 말이다. 사회적 책임감에 짓눌려 원하는 바를 펼치지 못하고 또래의 연령대에 요구되는 역할을 억지로 수행해야 할 때, 사람들은 ‘아이에 머물고 싶다’라고 여긴다.

 

물론 사회에서는 적정 시기에 취직하고 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낳아 ‘정상 가족’을 이루는 것을 ‘진짜 어른’이라고 강요하지만, 각자에게 맞는 삶의 방식이란 따로 있는 것이라 취업-결혼-출산과 육아가 모두에게 해당하는 미션 카드가 아님은 분명하다.

동심이란 곧 마음의 해방

얼마 전, 애니메이션 <빨간 머리 앤>의 작가인 타카하타 이사오의 전시를 관람했다. 아이의 동심을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았던 타카하타 이사오는 1974년 작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를 만들 때 하이디가 따뜻한 봄을 마주하며 알프스의 언덕에서 두꺼운 옷을 다 벗어젖히는 과정에 공을 들였다고 한다. 하이디는 주로 신발도 신지 않고 알프스산맥을 뛰어다니는데, 이처럼 몸을 옥죄는 굴레에서 벗어나 드넓은 봄날의 초원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일컬어 타카하타는 ‘아이의 동심이란 해방’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빨간 머리 앤>에서는 앤의 동심이 상상의 친구로 나타난다. 보육원에서 외톨이로 자란 앤은 고독에서 해방되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해야 했다. 거울 속의 ‘나’가 또 다른 세계의 친구이고 그 아이는 지금의 나와는 달리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상상, 내가 허공에 하는 말은 혼잣말이 아니라 가상의 친구와 하는 것이라는 상상,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게 내일은 더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상상…. 마릴라 아주머니는 앤에게 ‘망상은 그만하라’라고 지적하지만, 그 망상이 오히려 앤에게는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바로 앤이 했던 상상이 아닐까?

영화나 애니메이션 속의 동심은 마주할 때마다 마음속의 울림을 준다. 픽사가 만든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는 어린 시절에만 만나는 상상의 친구 빙봉이 등장하는데, 몸은 솜사탕이고 얼굴은 코끼리를 닮은 ‘빙봉’은 어른이 되면 사라지는 친구다. 빙봉은 울면 사탕 눈물을 흘리는 데 어린 시절에 누구나 해봤을 상상을 반영한 설정이다.

 

 <이프: 상상의 친구>는 엄마의 죽음 이후 지나치게 빨리 어른이 된 소녀가 우연히 상상의 친구를 만나며 다시 기쁨과 희망을 찾는 과정이 그려진다. 이렇게 동심을 잃은 어른, 모종의 사건으로 아이다움을 빼앗긴 아이가 다시 기쁨을 찾는 이야기를 보면 감동이 느껴진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러하듯, 주인공들은 현실적인 이유로 자기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기쁨을 찾고 자주 감탄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그것들을 되찾아간다. 빨간 머리 앤이 시끄러우리만치 자주 감탄하고 감동해 삶에서 애써 기쁜 일을 찾아냈듯이, 픽사의 애니메이션에서도 ‘동심’이란 우리 내면에 원래 존재하던 것이고 누구나 그것을 다시 발굴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오늘 나의 소소한 기쁨에 충실하기

다시 돌아가, 철없고, 아이다웠던 가장 최근의 기억이 언제였는지를 되새겨 보니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라일리(인사이드 아웃)와 비(이프: 상상의 친구)가 나이가 들며 잃었듯이 나 역시 상상하는 기쁨을 잃어버린 것이다. 재미있고, 즐거웠던 추억 따위는 얼마든지 꺼내 볼 수 있지만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떨었거나 여행하며 이국적인 풍경에서 한껏 휴식을 취했던 기억은 ‘동심’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벅차올라 별 이유 없이 웃음이 새어 나오고, 내일이 다가오는 것이 못 견디게 기쁘고 많은 상상과 가능성을 품고 있던 때를 다시 떠올려 보자. 언제였더라.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을 의심치 않았던 때,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가질지 고민하기보다는 그 순간의 환희에 집중했던 날들이 떠오른다. 이런 날들은 아마 당신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철없음은, 미래를 너무 걱정하며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않아야 가능한 걸지도 모른다. 내일의 생활비, 모레의 집세, 말일의 카드값 청구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그저 지금 나의 기쁨에 충실한 것. 바깥공기가 여름의 습기를 머금기 시작한 것에 감탄하고, 어제와 달리 햇빛이 조금 뜨거워진 것에 기뻐하며 오늘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고 아침에 잠시 두근거리는 일. 아니, 굳이 좋은 일이 나를 찾아오지 않아도 좋은 곳에 나를 잠시라도 데려다 놓고 상상의 친구를 만나는 것이다. <이프: 상상의 친구>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네가 사랑한 그 무엇도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우리가 사랑했던 것은 SNS에서 전시되는 값비싼 물건도, 맛집 체험도, 그 어떤 신상도 아닐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것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있다. 잠시 잊고 있었을 뿐이다.

글. 김송희

<빅이슈코리아> 편집장. 전 <씨네21> 기자, 한겨레 카카오 등 온 · 오프라인의 미디어에 대중문화 글을 기고했다. 책과 영화 관련해 강연 및 연재 활동 중. 고양이 후추의 집사. 인스타그램 @cheesed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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