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지혜의 서재] 내 안의 낭만을 깨워준 책들

삶에 대한 낭만을, 초심을 떠올리게 해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황지혜 독립서점 <지혜의서재 > 운영자

안녕하세요. 저는 한 사람을 위한 큐레이션 서점을 운영하고, 잠 못 이루는 이들을 위해 팟캐스트 방송을 녹음하며, 가끔은 외부 청탁을 받아 글을 쓰며 살고 있습니다. 모두 제가 좋아하는 책으로부터 출발한 일들입니다. 책을 좋아하다 보니 저절로 하게 된 일이지요. 그런데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니 말 그대로 ‘사는 것’에 치여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낭만에 대해 자주 잊게 됩니다. 초심과 멀어지게 되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책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낭만을, 초심을 떠올리게 해 준 건 역시나 책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세 권을 골라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1. 김환기 <뉴욕 일기>

이 책은 김환기 화가의 1963년부터 1974년까지 뉴욕 생활을 담은 책입니다. 작가의 편지, 일기, 드로잉이 함께 들어있어요. 김환기 화가는 한국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예술가입니다. 특히 동양철학과 서구 모더니즘을 접목한 그림 세계가 널리 호평받고 있습니다.

그림 감상을 즐겨하는 편이 아님에도 우연히 김환기 화가의 작품을 미술관에서 실제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오래 이 그림들을 두고 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림을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 어느 때보다 이해하게 되었지요. 그림의 ‘그’ 자도 모르는 저이지만 아주 가끔 어떤 그림이 제게 훅 다가오는 것 같은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제 안에 간질거리는 에너지를 만들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어쩌면 색감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닌데 그날 김환기 작가의 많은 작품들을 보며 그런 기운을 받았습니다.

 

그의 그림을 살 수는 없는 상황이기에 집으로 와 그의 이름으로 된 책들을 찾았습니다. 현재 나와 있는 책들을 거의 구입했고 그중 한 권이 <뉴욕 일기>입니다. 그의 일기에 담긴 삶이 그림만큼이나 제게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잠시 잠잠히 잠들어 있던 설렘도 깨워주고요.

 

10월 27일
늦게 나가서 커피 두 잔에 토스트 두 쪽 먹고 커피 한 잔. 동그란 빵은 버터를 덥석 발라 사들고 왔어요. 아, 남창에서 따듯한 햇볕이 들어와요. 3평 남짓 되는 방이요. 맑은 광선에서 모처럼 과슈나 해보겠어. 그럼 여기서 좀 쉬고.

 


11월 21일
맥주를 마시며 그림도 바라보고 창밖도 내다보고 하는 동안에 아주 캄캄해졌어요. 지금 서울은 새벽인가.

 

김환기 화가의 일기에는 작품에 대한 진지한 고민, 결심도 적혀 있지만, 날씨, 삶에 대한 사색, 산책,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은데요. 그걸 읽고 있다 보니 당시 현재 제 나이보다 10살은 더 많은 작가의 생각과 삶보다 현재 저의 삶이 더 낡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오래 그림을 그려 온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삶과 열정은 싱그러워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고작 이 일을 한지 10년도 안 된 나는 왜 벌써 이렇게 낡고 헤졌을까?’ 하며 제 안을 들여다보게 되더라고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설렘을 느끼며 지혜의서재를 찾아주는 이들을 위해 정성을 쏟는 내가, 내 일이 좋았던 순간들이 분명히 있는데 어느 순간 쫓기듯 해치우듯 또 어떨 땐 마치 기계처럼 일하는 스스로가 보였습니다. 동시에 그처럼 나이 들고 싶다는 낭만을 다시 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아직 완독하지 않았습니다. 아껴 읽는 중이에요. 언제고 제 마음이 시들 때 물을 주듯 읽고 싶어서요.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지만 그의 정신이 그 책 속에 영원히 남아 제게 낭만이라는 주문을 걸어줄 것입니다. 뿔테안경을 쓰고서요.

 

2. 정지혜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

정지혜 작가는 작가이자 사적인 서점의 운영자이기도 합니다. 저의 선배님인 셈이죠. 제가 한 사람을 위한 큐레이션 서점을 열기로 결심했을 때 사적인 서점의 존재가 큰 용기가 되어줬습니다. 지혜의서재가 탄생하기 전부터 있었던 사적인 서점은 여전히 멋지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또한 제게 힘이 됩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는 저에게 지도와 같은 책입니다. 같은 일을 먼저 시작한 사람의 지혜가 잔뜩 들어있으니까요. 이 책에서 이미 저보다 앞서 걸으며 장애물이 어디 있는지, 진흙탕 길이 어디 있는지, 미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던 그녀는 그것들을 잘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파악하고 알려줍니다. 피할 수 없는 어려운 길을 건너는 방법도요.

 

그러다 직업병이 생겼습니다. 한 번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걸 꺼리게 되더라고요. 재독할 시간에 새로운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읽는 게 효율적이니까요. 읽고 싶은 책보다 필요에 의해 읽어야 하는 책을 먼저 찾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중략) 그때 깨달았습니다. 책 말고도, 일 말고도 내 삶을 지탱해 주는 다른 축이 생겼다는 걸요.

 

정확히 똑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책 읽는 것이 취미이자 행복이었던 제게 독서가 일이 되어버린 것이죠. 순서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소개할 책을 좋아해야 하는 상황이 잦아졌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습니다.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될 때 겪는 부작용 같은 것은 반드시 있을 거라 예상했음에도 막상 겪게 되자 겁이 났습니다. 이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잃게 되는 건 아닐까. 내 오랜 꿈이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그때 덕질에 관한 정지혜 작가의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는 가볍게 저를 구해줬습니다. 심한 중병에 걸린 건 아닐지 걱정하다 간 병원에서 별것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처럼 이 책이 무거웠던 저의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줬습니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간단해요. 좋아하는 것을 더 자주 하고 싫어하는 것을 덜 하면 됩니다.

 

책 말고도, 일 말고도 저를 지탱해 주고 있는, 이미 좋아하고 있지만 잠시 잊고 있었던 것들에 눈을 돌렸습니다. 순수하게 즐거움만을 위한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시 창작 모임에서 시도 쓰고, 좋아하는 이들과 모여 앉아 뜨개질하고,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의 영화를 찾아보며 좋아하는 것들을 더 끌어모았습니다. 그러자 흔들리던 마음의 진동이 조금씩 잦아들었습니다. 좋아하는 것들이 좀 더 단단하게 저를 지탱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좋아하던 일이 어느새 나를 짓누르는 의무가 되어 힘들 때 이 책의 제목을 떠올립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

 

3. 서윤후 <고양이와 시>

<고양이와 시>는 출판사 아침달의 에세이 시리즈 <일상시화>의 첫 번째 책입니다. 서윤후 시인의 고양이 희동이와 시에 관한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사실 이 책은 제목만 보고 구입했습니다. 제가 무척 사랑하지만 가까이 갈 수 없는 두 존재가 합쳐진 제목이라 사지 않을 수 없었지요. 다가와 주지 않는데도, 바라봐 주지 않는데도 놓을 수 없는 고양이와 시에 관해 작가는 어떤 글을 썼을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시 쓰는 삶을 동경했어요. 중고등학생 시절 다이어리에 꽤 많은 시를 쓰곤 했습니다. 감수성이 그 어떤 때보다 풍부했던 시절이기도 했고 시인이라는 존재가 제게 무척 낭만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시를 쓰는 것은 물론 읽는 것도 어려워졌습니다. 저는 시를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해하려 할수록 시는 저에게서 더 멀어져만 갔습니다.

 

고양이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는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고양이를 키우는 이들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매력이 있었어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요. 고양이와 함께 있는 작가들의 사진을 자주 접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키우던 강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더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때에 갑자기 작은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제 인생에 뛰어들었습니다. 제가 바로 그 고양이를 키우는 매력적인 사람이 된 거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고양이도 시처럼 제가 이해하려 하고 다가가려 할수록 멀어지기만 했습니다. 점점 더 어려운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매력적인 집사는커녕 고양이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쩔쩔매는 지질한 집사가 되었습니다. ‘나만 그런 걸까, 나만 그런 것 같아’ 싶은 마음이 들 때 이 책을 만났습니다.

 

나의 조바심으로부터 고양이를 더 내밀하게 들여다보려고 한다거나, 귀찮게 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고양이는 귀신같이 눈치채고 멀리 달아나 앉는다. 서로 손에 닿지 않지만, 바라봐 줄 수 있는 쪽에 벌어져 서서는, 그 거리감을 유지한다. 무릎 위에 올라타거나 놀아달라고 옷소매를 입으로 물고 당기지 않는다. 그런 거리감이 익숙한 것은, 내가 의미를 찾는 대신 거닐게 되는 시 안에서의 거리감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인은 그 거리감이 필요한 거라고 말합니다. 사랑하기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고 만지고 싶고 더 잘 알고 싶은 마음이 들어 조바심을 내곤 했습니다. 시를 좋아하면서 어렵게 느끼는 것도 내가 왜 좋은지 명확하게 해석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시인은 ‘의미를 찾는 대신 거닐게 되는 시’라고 표현합니다. 동네 탄천을 산책할 때 그저 천천히 거닐며 반짝거리는 윤슬, 청명한 하늘, 진한 초록의 식물들, 느긋하게 떠다니는 오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고 충만해지듯 시에서도 굳이 이유를, 답을 찾아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고양이와 시를 서로의 은유로 만들어 따듯한 에세이로 엮어내는 시인의 글이 무척 좋았습니다. 이 책을 읽은 이후로 더는 고양이와 시에 억지로 다가가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고양이와 시가 낭만적인 존재로 돌아갔습니다.

 

 

글. 황지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서점 ‘지혜의서재’를 운영하고 잠 못 이루는 이들을 위해 책 이야기를 하는 팟캐스트 방송 <잠 못 이룬 그대에게>를 진행하고 있다.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도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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