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 한 중년 여성이 제 상담실로 찾아왔어요. 그녀는 자기 아들(A 씨) 방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죠. 방 안에는 컴퓨터 두 대와 여러 전자기기, 언제 빨았는지 모를 흐트러지고 얼룩이 잔뜩 묻은 침대와 이불, 바닥에는 먹다 남아 비틀어진 컵라면과 탄산음료, 음식물 곰팡이가 피어 있는 일회용 그릇과 나무젓가락 때문에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였어요. 어머니는 휴대전화에 있는 사진을 보며 우셨어요. A 씨처럼 스스로 은둔하고 혼자 있는 것이 너무 익숙해진 사람. 우리는 이를 ‘은둔형 외톨이’ 또는 ‘히키코모리’라고 부릅니다.
만성화되기 쉬운 은둔형 외톨이
은둔형 외톨이는 10대 중반부터 나타나고 있어요. 최근에는 20대 중반을 넘어 30대~40대까지 이어지며 은둔형 외톨이가 되는 연령 폭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은둔형 외톨이도 종류가 많아요. A 씨처럼 집과 방에서 절대 나오지 않는 사람, 가까운 편의점이나 미용실 정도는 가는 사람, 아니면 학교나 회사만 다니고 그 외 시간에는 은둔하는 사람 등이 있어요.
은둔의 종류가 다양한 이유는 정서적, 경제적, 육체적 소진으로 인해 일시적인 휴식기를 갖는 것처럼 보이다가 점차 만성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에요. 스스로 이러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어 심각한 공포나 고통으로 자살을 시도하거나 외부의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고립을 선택하게 했을까요?
번아웃, 두려움 그리고 소외감
첫 번째는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친밀한 관계에서의 소외감이에요. 공감받지 못했던 작은 일들이 쌓이고 쌓여 두꺼운 벽이 된 것이지요. 학교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 갈등이나 학교생활의 부적응으로 인해 은둔형 외톨이들은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요.
두 번째는 번아웃이에요. 성공 위주로 평가하는 세상과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살면서 사회와 대인관계로부터 멀어지고 싶어 고립을 선택했을 수도 있어요. 처음에는 단순히 사람들과 떨어져 쉬고 싶었는데 이 기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니까 너무 많은 것이 변해있던 거죠. 그 변화를 따라가기도 버겁고 적응하기도 힘들고요. 이런 시간이 길어지면서 불안은 더 심해지고 좌절감과 자책감으로 자신을 짓눌러 자존감마저 무너져 내려요. 그래서 다시 나갈 자신은 더 없어집니다.
세 번째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에요. 위험을 더 많이 감지하는 개인의 기질과 부정적인 경험이 합쳐져서 세상이 너무 두렵고 무서워 밖을 나가지 못하게 된 것이지요. 앞서 말했던 A 씨는 학창 시절까지 활발하고 대인관계도 좋은 편이었어요.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건강이 위태로웠던 적이 있었고 이때 경험한 공포심으로 밖이 무섭고 죽음의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다고 해요. 자신은 개미보다 작게 느껴지고 세상은 거대한 고통의 바퀴처럼 보이며, 바깥을 나가는 순간 그 바퀴에 깔려 죽을 것 같은 공포라고 했어요.
은둔형 외톨이들은 자신의 방에서 자신의 세상을 만들고 한눈에 들어오는 안전한 자기 세상인 그 방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요. 그래서 이들을 강제로 꺼낼 수는 없어요. 강제로 외부와 만나게 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요. 자칫 잘못하면 더 안으로 숨어버릴 수 있거든요.
간섭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
가깝고 소중한 사람이 은둔형 외톨이로 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이 잠시라도 바깥을 보려고 할 때 여기가 안전한 환경, 안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는 거예요. 말이 아닌 느낌이 중요해요. 그들도 사실은 바깥이 싫은 게 아니라 두려워서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죠. 촉촉하고 안전한 환경이 마련되면 한 번쯤은 바깥 구경을 시도할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예요. 은둔형 외톨이를 위해 가족과 그 주변이 일관적으로 촉촉하고 따뜻해야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를 대비해 미리 안전한 환경을 마련하고 있다면 재빨리 골든타임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안전한 환경이란 무엇일까요? 안전한 환경은 무관심하지 않으면서도 과도하게 개입하지 않고 은둔형 외톨이가 된 그들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환경이에요. 도움을 요청할 때는 기꺼이 돕고 도움 없이 자기 삶에 머물고 싶어 할 때는 기꺼이 허용해 주는 환경이죠. A 씨의 어머니가 저와 상담을 시작했을 때는 은둔하는 자식을 부끄러워했고,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저는 A 씨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A 씨 어머니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어요. 상담 후기에 들어서면서 A 씨의 어머님은 더 이상 자식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게 되었어요. A 씨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 때 편하게 느낄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린 거죠. 그리고 A 씨는 2개월 만에 방문을 열었습니다.
소박하게라도 스스로를 돌보는 마음
문지방과 대문이 삶의 경계처럼 느껴지는 은둔형 외톨이들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저도 가끔은 잠수타고 심해에 있는 것이 거센 파도가 있는 바다 위보다 좋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심해에 있으면 나중에는 빛이 그리운 게 아니라 빛이 두려워지더라고요. 이럴 때 저는 몇 가지를 생각해 봐요. 내가 혼자 있을 때 얻는 것은 무엇이며 잃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혼자 있기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잖아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요. 그리고 얻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것도 있어요. 저는 혼자 있을 때 편안을 얻었지만, 행복을 잃었어요. 조용함을 얻었지만 설렘을 잃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의무에서 벗어났지만 무엇을 시도할 용기는 잃었어요.
세상에 토라진 은둔형 외톨이들은 너무 많은 것을 하지 않아도 돼요. 아주 작은 것부터 타이머를 맞추고 시작해 보세요. 1분만 문 열어두기, 2분만 거실에 있어 보기, 5분만 길가에 핀 꽃들에게도 허락된 따스한 햇빛을 느껴보기, 10분 만이라도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를 지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을게요. 다만 가장 소박하게라도 스스로를 돌봐 주세요. 더 이상 내가 나를 소외시키지 않고 언젠가는 삶의 경계를 넘어보고 싶을 때를 위해 오늘 단 한 번만이라도 창문을 열어 내 방에 바람이 지나갈 길을 만들어 주세요. 그러면 그 길로 여러분의 마음도 바깥으로 걸어갈 수 있는 날이 곧 올 거예요.
글. 웃따(상담심리사)
18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 ‘상담심리사 웃따’를 운영 중인 상담심리사이자 작가. 채널 이름처럼 구독자들에게 ‘웃긴데 따듯한 심리한 솔루션’을 전하고 있다. 상담하면서 쌓은 지식과 오랫동안 자신의 상처를 보듬으며 깨달은 인생의 지혜를 심리 에세이 <인생을 숙제처럼 살지 않기로 했다>에 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