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자들은 자신이 무언가를 얼마나 잘 하는지에 따라 스스로를 평가하지 않고 바람직한 기준에 자신이 얼마나 못 미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정답을 맞힐 때는 점수를 주지 않는데 오답에는 점수를 깎는 시험을 치른다고 상상해보라. 문제 하나하나를 푸는 데 조바심을 내고, 실수를 한 번만 해도 시험에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완벽주의자들이 사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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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감점만 있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괴로울까요. 맞춘 것은 그대로 0점이지만 틀린 것에는 빠짐없이 감점을 준다면? 그것이 바로 완벽주의자가 갇힌 세상입니다. 잘한 것은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못한 일에는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붙이죠. 당연히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바로 그들 자신이 스스로 가둔 마음의 감옥이라는 점이죠. 자신만이 그 감옥의 문을 열고 나올 수 있습니다. 힘껏 움켜쥐고 있던 비현실적인 기대를 내려놓을 때입니다.
완벽주의적인 기준에서 실수는 절대로 지워지거나, 잊히거나, 보상될 수 없다. 또한 완벽주의적인 기준은 (‘두 번째 기회’가 없기 때문에) 첫인상이 지속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암시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때는 언제든지 최상의 상태에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완벽주의는 ‘그런대로 잘’ 한다는 개념이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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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는 만회할 수 없는 것이고, 첫인상이 곧 끝인상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남들은 내 실수를 기억하지 않고, 첫인상이 뒤집히는 순간도 빈번하게 있습니다. 아마 완벽주의자들 스스로도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머릿속 한 구석에 들러붙어 떠나지 않는 생각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작동에 맞서, 완벽주의자들 스스로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하는 명제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겠죠. '언제나 두 번째 기회가 있다.'
빨간 불빛이 들어올 때 응시하고 집착하고 안달을 내고 비현실적인 완벽함을 바라며 고통받고 싶은 유혹은 무척 강렬하다. 나는 연주회에서 이러한 유혹을 목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예술가가 공연에서 불안해하며 완벽함과 레이저처럼 날카로운 정확성을 추구하느라 정작 연주하는 능력을 잃는다. 해리스 주교의 말처럼, “충족감(완벽함)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파괴할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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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인 저자는 녹음실 안에서 완벽한 연주라는 비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하게 되는 고통에 대해 적습니다. 기계처럼 정확한 연주는 사람인 이상 불가능하고, 완벽한 연주에 집착할수록 오히려 '연주하는' 능력으로부터는 멀어질 뿐이죠. 우리 모두가 빠질 수 있는 완벽주의의 함정을 잘 말해주는 비유일 것입니다. 완벽주의는 불가능한 목표를 겨냥할 뿐더러, 우리를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피아노 음반 녹음의 한 가지 비밀을 알고 나면, 완벽함에 대한 생각이 좀 더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가장 완벽한 테이크를 그대로 음반에 싣는 것이 아니라, 좋은 부분들을 조금씩 더해서 하나의 연주를 완성한다는 사실 말이에요. 미진한 부분은 조금씩 메우고, 훌륭한 부분은 충분히 살리면서, 우리는 우리의 가장 좋은 버전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다음 기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운동이나 다이어트를 하려고 할 때마다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하나 있죠. ‘한두 번 빼먹기’입니다. (…) 연구 결과, 하루 이틀 빼먹은 것은 습관 형성 과정에 실질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다. 건강한 습관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행동의 반복이 필요하지만, 하루 이틀 놓쳤다고 해서 습관을 만드는 과정이 방해받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일주일 이상 손을 놓고 있으면 다시 할 가능성이 줄어들어 습관 형성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이 하루 이틀 거르는 일이 생기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공백이 길어지기 전에 다시 계획대로 실천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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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을 만들 때 반복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뇌가 그 행동에 익숙해지도록 꾸준히 반복하는 게 중요하죠. 하루 이틀 정도 빼먹는다고 해서 큰 영향을 주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낙심하고 손을 놓아버리거나, 한 두 번 누락을 용인한 것이 결국 장기적인 포기로 이어진다면 습관 형성에 실패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한 번 정도는 쉬어가도 괜찮습니다. 오늘 못했으면 내일 하면 되니까요. 스스로를 몰아붙이다가 영영 손을 놓게 되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그저 다시 하면 됩니다.
강박관념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어느 부분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인지 스스로 되돌아보아야 한다. “해보자!”하고 마음먹어도 할 수 없다. “하지 말자!”고 생각해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그런 강박관념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 때에는 “하지 말자!”고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나의 무엇이 충족되어 있지 않은 것일까?”하고 되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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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자'와 '하지 말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해야 한다'라는 의무감입니다. 당연히 잘 될리가 없지요. 바꾸고 싶은 그 행동을 계속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의지를 앞세우기 전에, 무엇 때문에 내가 이 행동을 반복하는지, 그 기저에 있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걱정이 습관이라면 내가 불안감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요, 회피가 버릇이라면 왜 두려운 마음이 드는지를 파악해야겠지요. 나에게 채워지지 않은 것, 그것이 무엇인지 자기에게 질문해 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람이 성장을 하려면 안도감이 있어야 한다. 안도감은 공포를 느끼지 않는 상태다. 안도감 대신 공포감이 있으면 퇴행욕구나 성장욕구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가 결국 퇴행욕구에 매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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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심리학자들도 충고합니다. 스스로에게 가혹하기보단 친절하라고요. 공포감 속에서는 도전적인 선택보다는 위험을 회피할 수 있는 안전한 선택만을 하게 되겠지요. 채찍질이 성장을 도울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날 때입니다.
남을 쉽게 비판하지 않으면서 자기반성은 또 엄청 열심히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건 좋지만 지나친 자기비판은 삼가는 것이 좋아요. 자신을 과소평가하게 되거나 자존감을 떨어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죠. ‘객관화한 자신을 조망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답니다. 과도한 자기비판은 ‘자기 태만’의 한 형태로도 발전할 수 있어요. 자신을 비판함으로써 건강하지 못한 행동을 이어가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찾는 거죠. 이럴 때는 자신과 대화하는 연습을 해보는 것도 방법일 수 있어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거죠. 그리고 쓰다듬어주세요. 내가, 나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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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사람일수록 스스로에게서 고칠 거리를 찾아내는 버릇이 들어 있지요. 잘못된 점을 바로잡는 것이니, 발전에 도움이 될까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나는 쓸모 없어, 또 이런 실수를 했네, 이 정도도 못 해내다니 가치가 없어. 이런 채찍질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거나, 온당한 비판에도 더 방어적이 됩니다. 옳은 선택을 하기가 더 힘들어지죠. 스스로를 관리한다고 믿는 행동이, 실은 스스로를 방치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습관적인 자기비판보다, 습관을 거스르는 자기연민이 더 도움이 됩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엮이지 않을수록 자신의 문제를 더 들여다보기 쉬워지니까요.
자기비판으로 괴로워하는 수많은 내담자들을 치료해온 심리치료사로서 우리는 자기비판이 성공에 반드시 필요한 연료라는 신화를 단호하게 부정한다. 당신은 스스로를 혹독하게 질책했고 당신이 하고자 했던 일을 성취한 것뿐이다. 말하자면 그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을 뿐 한 가지가 다른 한 가지를 유발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설령 그 인과관계가 분명하더라도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자신이 부족하다 여기며 그 비판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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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자신을 채찍질할수록 좋은 성과가 나온다는 것은 잘못된 상식에 불과합니다. 압박감은 불안감을 낳고, 불안감은 문제를 회피하고 싶게 만들 뿐이죠. 적당한 수준의 불안감은 우리가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동력이 될 때도 있지만, 필요 이상의 불안과 자책은 오히려 과제에 집중할 에너지를 갉아먹을 뿐입니다.
안 그래도 이미 세상에는 내게 좌절감을 주는 일들이 많은걸요. 내가 내 자신에게 주는 좌절은 최소화해야 합니다.
자기 연민을 하는 게 꼭 부정적이고 나쁘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게 되게 중요한 ‘자기 연민’이 되고요. 참 신기하게도 많은 분들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순간이 딱 그 순간이에요. 감정적으로 막 올라와요. 내가 너무 미안하다, 나 자신한테 미안하고 좀 내가 불쌍하다, 한 번 그런 걸 제대로 경험해야지 강박적인 완벽주의에 대한 것이 풀려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내가 머리로 생각해서 행동하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완벽주의가 저절로 풀려서 자연스럽게 하게 돼요. 사람은 완벽하지가 않고 별로여서 게으를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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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스로에게 엄격할수록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의 부족한 부분에 집중할수록 우리의 마음에는 불편한 감정이 생기고, 실제로는 문제를 회피하게 만듭니다.
누구에게나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는 순간, 우리는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비로소 문제에 다가갈 수 있게 되지요. 스스로에게 가혹하기보다 자비로울 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해집니다.
하루의 시작이 완벽하지 않아서 오늘 하루를 포기하고 싶을 때, 정해진 규칙과 루틴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매달릴 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습관적으로 책망할 때가 있다. 그럴 때에는 대충이라도 해 보는 것이 어떨까. 설거지가 하기 싫으면 물로 대충 헹궈 싱크대 위에 쌓아두고, 침구를 교체할 힘이 없으면 룸 스프레이를 대충 뿌리고 자기.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 마시기 귀찮으면 여행용 드립백을 꺼내 대충 마시기. 일하기 싫으면 메일함의 급한 연락만 먼저 해결해 놓기. 완벽할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 되뇌면서 백 마디 투정과 수많은 핑계도 대보자. 그렇게 대충 하다보면 어느새 하나씩 채워져 완벽에 가까운 때가 올 것이고, 그럼 또 아무렇지도 않게 끝까지 해내고 있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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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계획만 잔뜩 세워두고 실천하지 못해 흐지부지 되었던 경험, 그런 자신을 자책했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지요. 그건 내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계획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잘못된 것입니다. 계획은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은 하기 싫은 게 당연합니다.
대충이라도 해낸다는 마음으로 시작해 봅시다. 완벽하게 해내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생각은 잠깐 접어두고요. 관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뭐라도 일단 시작하게 되면 하는 방향으로 관성이 붙을 것입니다. 어질러진 물건만 치우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어느 새 깨끗한 집을 보기 위해 청소기를 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요.
완벽주의자들은 자신이 무언가를 얼마나 잘 하는지에 따라 스스로를 평가하지 않고 바람직한 기준에 자신이 얼마나 못 미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정답을 맞힐 때는 점수를 주지 않는데 오답에는 점수를 깎는 시험을 치른다고 상상해보라. 문제 하나하나를 푸는 데 조바심을 내고, 실수를 한 번만 해도 시험에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완벽주의자들이 사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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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감점만 있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괴로울까요. 맞춘 것은 그대로 0점이지만 틀린 것에는 빠짐없이 감점을 준다면? 그것이 바로 완벽주의자가 갇힌 세상입니다. 잘한 것은 당연하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못한 일에는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붙이죠. 당연히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바로 그들 자신이 스스로 가둔 마음의 감옥이라는 점이죠. 자신만이 그 감옥의 문을 열고 나올 수 있습니다. 힘껏 움켜쥐고 있던 비현실적인 기대를 내려놓을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