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시선과 관계되지 않은 자기만의 창조적인 일을 해보는 것 자체가 자율적인 인간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쓰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표현할 단어를 모색하게 된다. 오늘 있었던 일을, 감정의 복잡함을 어떤 단어로 표현할지 자기가 결정한다. 내적인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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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직업이나 사회적으로 부여된 역할로만 정의해야 한다면, 우리는 끝끝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필요나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순전히 내가 좋아서 하는 무언가를 가져 보아야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겨날 것입니다. 그것은 꼭 어떤 '일'이 아니어도 좋아요. 하루의 끝을 마무리하는 단 한 줄의 문장을 쓰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지요. 오늘의 나를 정의할 모든 권한은 나에게 있으니까요.
반면 사이드 프로젝트는 ‘온전한 내 몫의 성취’라는 점에서, 나를 새롭게 발견하게 해줍니다. 블로그에 글을 연재하는 것도, 매주 뉴스레터를 만들어 발송하는 것도, 회사 밖에서 모임을 만드는 것도 다 ‘성취’예요. 끌리는 것, 좋아하는 것, 마음 가는 것들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알게 되니까요. 그렇게 회사 밖에서 또 하나의 무기가 생기는 거죠. ‘나다움’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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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잘 살고 있는 걸까? 어떻게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문득 찾아오는 삶의 질문을 이어가다 보면,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궁극적인 질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물론 단번에 답을 내릴 수는 없겠지요. 우선은 해야만 하는 일들 대신 왠지 끌리는 것, 이유를 모르지만 좋아하는 것, 당장 쓸모는 없어 보여도 마음이 가는 것들을 시도해 보세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게 되겠지요. 또한 그 모든 과정을 내가 온전히 책임지고 해 나가야 할 테고요. 조직이나 회사 안에서 거대한 프로젝트의 일부가 되어 기능할 때는 몰랐던, 온전히 내 손으로 거둔 작은 성취를 알게 됩니다. 사이드 프로젝트의 묘미는 바로 그런 데 있지요.
“어느 계절을 좋아하세요?” 나는 ‘환절기’라고 말한다. 1년 중 환절기는 아주 짧지만 우리를 변화로 이끄는 중요한 시기다. 불어오는 바람결이 달라지고, 거리의 풍경이 바뀐다. 답답한 열대야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얼어붙은 세상을 따뜻하게 녹인다. 짧은 시간이지만 변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중요한 기간이다.
오아시스와 베이스캠프 그리고 환절기처럼 우리에게도 ‘내일’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변화를 기대하게 하는 기점이 필요하다. 내게 딴짓은 나다움을 찾기 위해 꼭 필요한 자기탐색의 시간이다. 딴짓에 몰두한 지난 시간은 사회가 규정한 ‘직업인’으로서 정체성을 넘어 세상에 실재하는 ‘나’를 발견하고 정의할 수 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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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목적과 관계 없는 일을 우리는 딴짓이라고 부릅니다. 오로지 목적에 부합하는, 다시 말해 쓸모 있는 일만 해야 한다면 삶은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 될까요. 그 목적을 꾸준히 추구하기 위해서라도, 이따금씩 일상을 환기하는 딴짓은 꼭 필요합니다.
때로는 쓸모 없다고 여겼던 딴짓이, 나를 발견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본업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표현해 주기도 하고요. 계절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의 환절기도 존재하는 것처럼요.
미래의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현재의 내가 준비해야 하니까. 현생이 바빠 죽겠지만, 도저히 마음의 여유가 안 나겠지만 그렇다고 미뤄 놓을 수는 없다. 가볍게, 최대한 가볍게 시작해보자. 당신의 미래를 위한 여러 모험을. 장담컨대 그 모험을 가장 즐거워할 사람은 현재의 당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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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만으로도 벅찬 삶이지만, 삶이 현생으로만 채워져 있는 것도 때로는 삶을 너무 무겁게 만듭니다. 모험을 시작해 볼까요, 일단은 가장 가벼운 것부터. 당장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내려놓고, 해보는 것에 의의를 두는 거죠. 모험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 모험의 끝에 꼭 대단한 보물상자를 얻지 못하더라도, 그 모험을 떠나기 전과 후의 나는 절대로 같지 않을 겁니다.
삶을 지탱하기 위해선 여러 개의 기둥이 필요한 거 같아요. 10년 전 저의 기둥은 ‘문화마케팅’이라는 외길 커리어, 딱 하나뿐이었던 거죠. 지금은 절대 외길을 걷지 않아요. 자꾸 골목을 만들죠. 부지런히 새 길을 파고, 그 길을 넓혀 나가다 보면 내 삶을 지탱해줄 또 하나의 기둥이 생기니까. 게다가 인생에 골목이 많으면 일상의 풍경이 재미있거든요. 배우는 것도 많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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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고 너른 길은 편리하고 쾌적하지만, 이리저리 구불구불 난 골목은 도시의 풍경을 더 흥미롭게 만들죠. 우리는 한 가지 길을 우직하게 걸어온 사람에게 경외심을 품지만, 여러 갈래의 가지를 뻗치며 자신을 확장하는 사람들 또한 존경받을 만합니다. 꼭 한 가지 길을 선택하고 그 길로만 내리 걷지 않아도 됩니다. 잠시 다른 샛길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오히려 우리는 삶을 지탱할 더 많은 기둥을 확보할 가능성 또한 갖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잘 변화하는 것도 능력인 시대가 되었다. 요즘 같이 불확실성투성이인 세상에서 새로움이 두렵다면 내 영역에서 한쪽 발을 단단히 두고, 알 수 없는 그곳에 다른 쪽 발을 내딛어보자. 조금은 적극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의도적으로 나를 노출해보자. 내 영역을 더 넓고 깊게 확장해나가는 것은 물론, 막연한 두려움을 예방하는 마음 근육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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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환경에 자신을 던지는 것은 두렵습니다. 하지만 안전한 상황에만 머물러 있는 것 또한 내키지 않는다면?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약간의 변화를 시도해 보는 게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딴짓 말이지요.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일들,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 읽지 않았을 책들, 가보지 않았을 장소들. 조금씩, 그러나 적극적으로 일상에 틈새를 내 보는 겁니다. 혹시 아나요? 그렇게 낸 샛길이 점점 넓어져 나만의 대로가 될지.
진짜로 작품으로 뻗어나갈 뭔가는 사이드 프로젝트(Side Project)에 있다는 것이다. 사이드 프로젝트란 그냥 미적거리고 있는 일들이다. 그냥 심심해서 해보는 일들이다. 그런데 그 일들이 사실은 진짜 좋은 소재가 된다. 그런 일들이 마법을 부린다. 나는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면서 그 일들 사이를 넘나드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한 프로젝트에 질리면 다른 프로젝트를 하고, 또 이 프로젝트를 하다가 싫증이 나면 아까 그 프로젝트로 되돌아가면 된다. 생산적인 ‘이리 미루고 저리 미루기’를 습관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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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일을 우직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시작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일단 해보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하다가 질리면 또 다른 일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 자체가 시작을 좀 더 가볍게 해 줄 수도 있지요. 그렇게 여러 갈래로 관심사를 뻗어나가다 보면, 진짜 내 일의 좋은 재료가 되어줄 무언가를 찾아낼 것입니다.
저의 자부심 중의 하나는 제가 통섭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이래, 우리 사회에서 ‘소통 없이 한 우물만 파라’라는 말이 거의 자취를 감췄다는 겁니다. 이제는 대다수가 주변인과 융합해야 한다고 느끼죠. 저의 딴짓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생물학만 내내 공부했다면 저는 지극히 평범한 곤충학자, 어쩌면 신기한 작은 곤충을 연구하는 사람으로만 살아갔을지 모릅니다. 제가 오지랖이 넓게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해준 공은, 아무리 생각해도 딴짓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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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아서, 관심이 가서 놀이처럼 시작했던 딴짓들은 나의 생각과 세계를 넓히는 데 도움을 줍니다. 때로는 이 분야와 저 분야가 연결되며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내기도 하고요. 어떤 문이 내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까요. 지금 당장은 큰 쓸모가 없어보일지라도, 우리가 딴짓에 좀 더 너그러워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몇 번의 경험과 깨달음을 통해 이제는 조금 확신하듯 말할 수 있다. 딴짓하거나 놀고 있는 게 아니라 조각을 모으고 있다고. 그리고 이것도 알게 되었다. 조각은 모으기만 하면 안 된다는 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은 이상 모은 조각에 먼지가 쌓이기 전에 뭐든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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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딴짓을 비생산적이라고 여깁니다. '지금 하는 일과는 전혀 관계 없는 일'이라는 딴짓의 사전적인 정의는 이런 인식에 기대어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관계 없어도 하게 되는 일이라는 점에서, 딴짓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닌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딴짓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는 조각 하나를 발견합니다. 얼핏 서로 관계 없어 보이는 조각들을 맞춰 나가며, 비로소 '나 자신'이라는 하나의 퍼즐을 완성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모두들 거절당하는 데 익숙해지면서 한 가지를 잊고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나 자신을 거절하고 있다는 거다. 특히 내 욕구,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거절한다. 난 다른 이에게도 거절당하는데 내 자신까지 거절해야 할까? 우리 삶의 목표는 무엇일까? 가족의 행복, 중요하다. 인류의 평화,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내 자신의 행복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그러면 나를 거절하지 않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방법은, 또다른 나의 캐릭터를 만드는 거다. 요즘엔 이걸 N잡러라고도 한다. 부캐라는 건 다른 이들이 봤을 때 ‘오, 이 사람은 저게 부캐구나!’라고 이야기할 순 있지만 내 스스로 미리 정하지 않고 꾸준히 하면 된다. 시간에 스며들다보면 나는 여러 캐릭터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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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만 하는 일들에 떠밀려 하고 싶은 일은 항상 뒷전으로 밀어두었다면, 나 자신을 거절하는 데 익숙해진 탓입니다. 내 욕구를 실현하는 데에 꼭 거창한 다짐이나 전면적인 진로 변경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내 욕구를 거절하는 데 익숙해진 상태라면 아마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부터 고민이겠지요. 전부 다 정해둘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일상에 스며들 정도로 꾸준히 해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돈과 시선과 관계되지 않은 자기만의 창조적인 일을 해보는 것 자체가 자율적인 인간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쓰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표현할 단어를 모색하게 된다. 오늘 있었던 일을, 감정의 복잡함을 어떤 단어로 표현할지 자기가 결정한다. 내적인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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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직업이나 사회적으로 부여된 역할로만 정의해야 한다면, 우리는 끝끝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필요나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순전히 내가 좋아서 하는 무언가를 가져 보아야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겨날 것입니다. 그것은 꼭 어떤 '일'이 아니어도 좋아요. 하루의 끝을 마무리하는 단 한 줄의 문장을 쓰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지요. 오늘의 나를 정의할 모든 권한은 나에게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