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두려웠다. 그래서 학기 중보다 방학이 더 바빴다. 영어 공부, 독서, 아르바이트, 학회 활동으로 방학을 꽉꽉 채웠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 나는 방학이 없어졌다는 것에 안도했다. 일을 하면서도 지쳤지만 쉬지 않았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하지 않고 있다는 죄책감이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모든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최선을 다한 게 아니니까.
나는 진심으로 최선을 다했다. 내 삶의 중심은 일이었다. 일을 위해 도움이 될 사람들을 만났고, 일을 위해 네트워킹을 했고, 일을 위해 운동을 했고, 다시 일을 잘하기 위해 잠을 잤다. 그렇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달려갔고, 결승점에서 나를 반갑게 맞이하는 존재가 있었다. 번아웃이었다.
열심히 살았는데, 찾아온 건 번아웃
번아웃의 증상은 다양하지만, 나에게는 일할 때 짜증이 솟구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미 피로와 짜증으로 가득 찬 마음은 아주 작은 일 하나로도 넘쳐버릴 것만 같았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마치 온몸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있는 것처럼 무기력하고 답답했다. 어떤 일을 시작하든 ‘하기 싫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찾아왔다. 출근길 달리는 자동차들을 볼 때 미친 척 뛰어들고 싶었다. 죽고 싶었던 게 아니다. 죄책감 없이 쉬고 싶었다.
나는 “좋은 휴식”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책을 읽거나 좋은 대화를 하거나, 발전적인 다큐멘터리를 보는 모습 같은 것. 그러나 현실의 나는 세상 쓸데없는 유튜브나 드라마를 보며 뒹굴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자랑스럽지 않았다. 그래도 나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봤다. “너는 이렇게 노는 게 좋니?” 그러자 마음속 어딘가에서 해맑은 대답이 들려왔다. “응!”. 그 목소리를 존중해 주는 것으로 나의 회복은 시작됐다.
스스로 쉬는 모습을 판단하지 않기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어릴 때 대단한 것을 하며 놀지 않았다.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흙장난하고,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배회하고, 집에 오면 소파에 이상한 자세로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게 다였다. 나에게 맞는 휴식을 찾기 위해 제일 처음 필요한 단계는 자연스러운 내 휴식의 모습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모습이든 좋다. 그 시간 이후 충전되었다고 느낀다면 그게 나의 휴식이다. 웃긴 동영상을 찾아보는 것(이건 내가 쉴 때 하는 것이다), 미소녀들이 경마하는 게임을 하는 것(이건 심리학자인 내 친구의 취미이다), 종이접기, 웹툰 보기 등등. 무엇이든 괜찮다.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시간을 허비하고 낭비해 보자. 원래 휴식이란 본질적으로 비생산적인 것이니까.
휴식하는 법을 익히니 조금씩 몸이 살아났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불편했다. 아무 생각 없이 유튜브를 보고 있을 때 “이렇게 생각 없이 쉬다가 인생 망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이 떠나지 않았다. 냉정하게 생각해 봤다.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1) 쉬지 않고 생산적으로 살면서 끝에 번아웃이 기다리는 삶 2) 적당히 쉬다가 망하는 삶. 생각해 보니 번아웃으로 망하나, 쉬다가 망하나 둘 다 똑같이 망하는 거였다.
옛말에 쉬다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고 하지 않던가? 이왕 망할 거 마음 편히 쉬기로 했다. 심리학에서는 이 과정을 행동실험이라고 한다. 왜곡된 믿음을 바꾸기 위해 믿음에 반대되는 행동을 해보는 것이다. 이런 실험을 통해 나의 믿음이 왜곡되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적당히 쉬는 건 내 인생을 망하게 하지 않았다. 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직접 실험해 보시길 권한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무조건 쉬기
휴식에 익숙해진 후 나는 ‘기계처럼 일하기’를 모토로 삼았다. 우리 시아버지는 엔지니어다. 놀라웠던 건 엔지니어가 쉬지 못할 때도 기계는 쉰다는 점이다. 비싼 기계가 과열되어 고장 나지 않게 주기적으로 작동을 멈추고 관리를 해준다. 그 기계에게 휴식은 열심히 작동한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당연한 일상인 것이다. 그래서 나도 일과 중에 잘했든 못했든 정해진 시간이 되면 무조건 쉰다. 처음에는 그 시간이 무척 어색하고 불안했다. 뭘 해야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어떤 일이든 익숙한 일상이 되기까지 무수한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나에게 맞는 휴식을 찾기 위해 시행착오할 시간을 허락해 주자. 우리가 기계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확신이 있다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찾게 된 휴식의 원칙은 간단하다. 1) 피곤하면 쉰다. 2) 하루 5시간 이상 집중해서 일했으면 퇴근한다. 3) 잘 쉬는 건 없다. 그냥 막 쉬자. 핸드폰 충전의 원칙과 비슷하다.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어 깜빡이는데 “뭘 했다고 배터리가 벌써 다 떨어졌어?”, “아니 넌 조금 더 작동해야 해”라고 타박만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는 그렇게 할까?) 그냥 핸드폰을 충전기에 연결하고, 충전이 될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일할 때 짜증이 나기 시작하면 일을 멈춘다. 지친 상태로 억지로 일하는 것보다 잠깐이라도 충분히 쉬고 다시 일하는 게 효율이 더 좋다는 걸 이제 알기 때문이다. 저녁 8시 이후에는 일과 관련된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유튜브에 심리학 관련 동영상이 뜨면 “채널 추천 안 함”을 클릭한다. 내 휴식의 모토는 허송세월이다. 소파에서 뒹굴뒹굴하며 유튜브도 봤다가, 드라마도 봤다가, SNS도 했다가, 책도 읽다가… 원하는 걸 내키는 대로 하는 자유를 만끽한다.
원래 방학의 묘미가 그런 것 아니겠는가? 시간표를 정성스레 만들어놓고 전혀 지키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자기 멋대로 사는 일상. 긴 휴가도 좋지만, 퇴근 후 한 시간만이라도 나만의 방학을 만들어보자. 멋지게 쉬지 않아도 좋다.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좋다. 방학은 원래 그러라고 있는 것이니까.
서늘한여름밤이 알려주는
짧은 방학 만드는 법
• 스스로 쉬는 모습을 판단하지 않기
어떻게 쉬는 게 좋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마음속에서 만족할 만한 휴식법을 찾는다면 그것이 바로 본인의 진정한 휴식법이다.
• 정해진 시간이 되면 무조건 쉬기
일과 중에 잘했든 못했든 정해진 시간이 되면 무조건 쉬자. 휴식은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당연한 일상이다.
• 일할 때 짜증이 나면 잠깐 일을 멈추고 쉬기
지친 상태로 억지로 일하는 것보다 잠깐이라도 충분히 쉬고 다시 일하는 것이 업무 효율을 위해서도 심신 건강을 위해서도 좋다.
• 하루 한 시간만이라도 나만의 방학을 만들기
멋지게 쉬지 않아도 좋고, 아무것도 남지 않아도 좋다. 매일의 방학을 만들고 스스로를 존중해 주자.
글. 서늘한여름밤
고려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광운대학교 코칭심리 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거쳐 현재 리다이브 코칭심리연구소 대표로 활동 중이다. 책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 <제 마음도 괜찮아질까요?>를 썼다. 인스타그램 @seobam_bree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