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한수희의 일기] 나는 공부를 좋아해

망해도, 실패해도, 비참해져도 이 경험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이 경험이 나를 살찌워줄 거라는 믿음이 있다. 나의 그 믿음을 귀히 여긴다.

한수희 작가

지난번 글에 불안장애를 치료한 이야기를 썼다. 그런데 그 동안 불안장애가 재발해 버렸다. 8개월 만이었다. 이유는 다양했다. 불안이 너무 뿌리 깊어서, 겨울에서 봄이 되는 환절기라서, 내 아이들의 미래가 걱정돼서, 단행본 원고 마감 스트레스로, 시아버님이 생사를 오가고 계셔서, 약발이 다 떨어져서, 갱년기가 가까워 오고 있어서. 이유가 뭐건 간에 아무리 노력해도 급격히 우울해지는 기분을 되살릴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다시 병원에 가기로 결정했다.


9개월 만에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의사에게 “저 진짜 오기 싫었거든요…….”라고 변명했다. 그만큼 나는 내가 나약한 인간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내가 졌다는 사실을, 또 한번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다시 1년간의 치료를 결정하고, 우울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뒷산을 오르고 저녁에는 40분씩 달리던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문득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매일 달리고 있기는 했지만 달리기는 사실상 고독하고 정적인 운동이었다. 좀 더 격렬한 활동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교감하고 연결되는 운동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게 뭘까? 테니스 동호회라도 들어야 하나? 우리 동네에 외발 자전거 클럽도 있는데 거기라도? 둘 다 당기지 않았다. 마침 검도 도장 간판이 눈에 띄었다. 저기라도 가야 하나?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생각하는 사람”

그래, 나는 오래 전부터 무도를 배우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본 작가 우치다 타츠루는 오랫동안 합기도를 수련하며 고베에서 도장까지 운영하고 있는데, 그의 생활과 합기도와 생각과 글은 하나로 연결된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삶의 모든 것이 분열된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생각하는 사람. 그때 떠올랐다. 쿵후! 쿵후가 있었지! 내가 사는 동인천은 한국 쿵후의 본거지다. 오래 전 중국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쿵후를 가르치고 배우며 생긴 도장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그 중 팔괘장의 정통 계승자가 운영하는 도장이 동인천역 근처에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한번 배워봐야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좀처럼 엄두가 안 나 수년째 시도하지 못했는데, 때가 온 것 같았다. 지금이었다. 지금이 쿵후를 시작할 적기였다. 나는 그 길로 곧장 도장으로 발걸음을 옮겨 문을 열고 물었다. “운동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태권도 도장 한번 다녀본 적 없는, 타고난 몸치인 40대의 나는 쿵후를 시작하게 됐다. 이제 두 달째인데 음… 뭐랄까… 이건 실력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한심한 수준이다. 워낙 몸을 안 쓰고 살아왔기 때문에 두 달째 몸만 풀고 있다고 해야 하나? 정통 팔괘장 계승자인 관장님께 죄송할 정도로 나는 이 도장에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한심한 아주머니 역할을 맡고 있다. 한 시간 동안 벽을 보고 앞지르기에 발차기를 하고 있는 내 꼴을 누가 본다면 코미디 영화를 보는 것 같겠지…… 하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쉰다. 한숨을 내쉬면서 열심히 한다. 이 돈을 내고 열심히 안 하면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앞지르기를 하고 발차기를 한다. 도장 가는 날만 되면 아침부터 마음이 무겁다가도 일단 몸을 풀기 시작하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1시간이 지나 도장을 나설 때면 무릎이 후들거리지만 마음은 좀 더 가볍고 단단해진 느낌이다. 좋다.

“천천히 하라. 그리고 어깨에 힘을 빼라.”

쿵후를 배우다 보면 선생님이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천천히 하라. 그리고 어깨에 힘을 빼라. 둘 다 내게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유튜브에서 한 정신과 교수도 그런 말을 했다. 입을 벌리고 어깨에 힘을 빼고 배를 턱 내려놓아라. 그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자세다. 실제로 그렇게 해보면 바보 같아 보인다. 그런데 그는 그 바보 같은 얼굴이 현자의 얼굴이라고 한다.


나는 뭐든 빠르게 한다. 어서 이걸 해치우고 싶기 때문이다. 과정 하나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음 단계,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른 집에 가서 드러누워 스마트폰이나 보고 싶기 때문이다. 맥주를 마시며 드라마나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이유는 잘하고 싶기 때문이다. 잘하고 싶고 틀리지 않고 싶기 때문이다. 틀린 것을 지적당한다는 생각만 해도 온몸이 뻣뻣하게 굳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내 문제가 그거구나. 늘 다음 단계를 생각하는 조급함, 그리고 실수하거나 실패하고 싶지 않은 경직된 마음. 그런 마음이 나를 불안으로 몰고가 결국 병을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이 불안은 쉽게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괜찮다. 두 번째 치료는 처음과는 다르다. 이제는 도움을 청할 곳이 확실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잘 안다. 내 불안을 좀 더 여유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게 되었다. 불안을 탓하는 대신, 이 불안 덕분에 가지 않았던 수많은 길들과 갈 수 있었던 수많은 길들을 생각한다. 불안은 나를 지켜주면서 나를 인도하는 등불 같은 것이었다. 문제는 불안이 내 모든 것을 잠식할 때 균형을 잡는 일이다. 나는 평생 그 일을 배우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쿵후’의 한자어는 功夫, 우리 말로 공부라고 읽는다.(물론 우리가 말하는 공부(工夫) 와는 한자가 살짝 다르지만 뜻은 거의 같다고 보면 된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공부하는 것이 너무 싫어서 대학만 들어가 봐라, 다시는 공부 따위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조차 끔찍해서 몸 쓰는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 각오도 품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오래 앉아 글쓰는 일을 하게 되었고, 서서히 내가 공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 공부는 내가 주도하는 공부였다. 누군가가 짜놓은 커리큘럼대로, 시스템에 맞춰 해나가는 공부가 아니라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스스로 선택해 나의 속도와 방향대로 해나가는 공부, 수료도 합격도 졸업도 없는 공부, 끝이 없는 공부였다. 그 공부에서 내 실력의 향상은 나만 안다. 경쟁 상대도 어제의 나…(라고 말하려니 오글거리지만)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라는 공자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이해하고 있다. 쉽게 불안해지는 약한 마음을 안고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공부를 좋아하는 인간이기 때문인 것 같다. 망해도, 실패해도, 비참해져도 이 경험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이 경험이 나를 살찌워줄 거라는 믿음이 내게는 미약하게나마 있다. 나의 그 믿음을 귀히 여긴다.

“나는 경험으로 내 가슴을 다독이고, 호기심으로 내 등을 떠민다.”

나는 호기심이 많고 모험을 좋아하는 동시에 겁이 많고 새로운 환경과 상황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타입이다. 나도 잘 이해되지 않지만 세상에는 그런 성향도 있다. 무서우면 안 하면 될 텐데 무서운데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괴로워지는 사람이 나다. 무척 피곤한 인생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나를 여기까지 움직이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 호기심과 모험심이 원동력이 되어 일을 하고 아이 둘을 낳고 친구를 사귀며 살아올 수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처음은 두렵다. 그래도 어릴 때처럼 울거나 배탈이 날 정도는 아니다. 이제는 나도 알기 때문이다. 처음만 이렇지 얼마 후면 괜찮아진다는 걸. 나는 경험으로 내 가슴을 다독이고, 호기심으로 내 등을 떠민다. 저쪽으로 가면 뭐가 보일까? 이걸 하면 나는 무엇을 느끼게 될까? 나는 무엇을 배우게 될까? 나는 무엇을 만나게 될까?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두 달째 쿵후를 하고 있어도 여전히 민망함과 불편한 느낌은 가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혹시 1년 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떠올리며 ‘짜식, 초짜 중의 초짜였군’ 하고 웃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계속 한다. 쿵후 고수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될 수도 없다), 매사에 잘하고 싶은 내가 잘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때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혹시 잘하지 못하는 그대로도 괜찮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 싶어 계속 한다.

 

불안은 삶을, 세상을 두려워하는 감정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매순간 두렵고 경계 태세다. 그러나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면 그건 또 설레는 일일 수도, 기대할 만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런 것을 배워나가고 있다. 그런 것을 나 자신에게 가르치고 있다. 쿵후를 배운 지 6개월이 되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지금으로선 그것이 가장 궁금하다.



글. 한수희(작가)

영화연출을 전공하고, 잡지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매거진 <AROUND>에서 책과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어쩌다 동인천에서 살게 된 사람들끼리 모여 ‘어쩌다 동인천’이라는 팟캐스트도 진행한다. 지은 책으로는 <온전히 나답게>, <마음의 속도>,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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