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에 나는 한 애니메이션 회사의 기획실에서 일했다. 비슷한 또래 직원들이 모인 회사 생활은 마치 대학의 소모임처럼 즐거웠다.(대학의 소모임 같은 데는 들어가본 적이 없지만.) 학창 시절부터 대학 4년 내내, 그리고 졸업 후 1년간의 아르바이트 생활 동안 언제나 겉도는 느낌에 힘들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나도 한몫하는 사람,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열심히 일했고 더 잘하고 싶었다. 더 잘해서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매일 자진해서 야근하던 어느 밤, 퇴근을 해야 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밖으로 나가다가 근처에서 공사중인 건물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지? 나는 그럴 리가 없다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러나 무너진 건물에 깔리는 나 자신에 대한 상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다음에는 길 가던 차가 나를 덮칠 것만 같았고, 그러다가는 전봇대가 쓰러져 거기에 깔릴 것만 같았다. 도무지 공포를 떨칠 수가 없었다. 결국 몇 시간 동안 고민만 하면서 사무실을 떠나지 못했다.
그때 뭔가를 깨달았더라면, 나의 병적인 불안에 대해 경각심을 가졌더라면 적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30대 중반에 사랑니 두 개를 뽑았는데, 사랑니는 나이가 들수록 더 뿌리 깊게 자리잡아 발치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어찌나 어려웠는지 하나를 뽑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정신적인 문제도 마찬가지다. 빨리 발견해서 빨리 치료받는 것이 최선이다.

“나의 불안은 오래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삶을 좋아했다.”
생각해보면 나의 불안은 오래 되었다. 사실 불안은 우리 집안의 내력, 또는 유전병이라 할 만했다. 나의 부모님은 불안하며 쾌활한 사람들이었다. 아빠의 불안은 조증으로, 엄마의 불안은 울증으로 발현되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그 확률을 피해갈 수 있겠는가. 어릴 때부터 새 학기가 시작되는 한 달 동안은 배탈을 앓았고, 수학여행 때마다 버스에 함께 앉을 친구를 찾는 것이 힘들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쉬워지지 않았다. 과속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 죽을까 무서워 늘 벌벌 떨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뭘 해서 먹고 살아야 좋을지 고민하느라 매일 불안하고 우울했다. 면접에 몇 번 떨어지고 나면 뺨이라도 얻어맞은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불안을 억누르면서 그럭저럭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친구를 사귀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럼에도 나는 삶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는 게 좋았다. 어쩌면 사는 게 너무 좋아서 무슨 일이 생길까 불안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가끔씩 까닭 없이 바닥으로 처지는 기분을 일으켜 세우려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런 마음으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둘 키웠다. 그런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장사를 하며 살았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춘기 아이들을 보며 안달복달했고, 들쑥날쑥한 매출을 보며 속을 태웠다.
40대 중반의 어느 날, 문득 사는 게 너무 무시무시하다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 내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터지기 직전이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러다 암에 걸리면 어떻게 하지? 암에 걸려 고통스럽게 죽게 되면 어떻게 하지? 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하지? 끔찍한 사고를 당한다면? 우리 아이들이 힘든 일을 하며 힘들게 살면 어떻게 하지? 아이들이 우울증에 걸리면 어떻게 하지? 아이들에게도 병이나 사고가 닥치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을 하고 또 하다가 너무 무서워져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죽어도 하기 싫던 일을 했다. 내 발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간 것이다. 의사는 내게 우울증은 심하지 않으나(다행!) 불안장애가 심각하다고 했다. 불안이 너무 심해 우울해진다는 것이었다. 잡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과부하가 올 지경이라고도 했다. 그는 이참에 불안을 뿌리 뽑아 보자며 1년 반동안의 약물 치료를 제시했다. 다행히 그가 처방한 약물은 부작용도 없이 내게 잘 맞았다. 곧 잠을 잘 잘 수 있게 되었고, 얼마 후부터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이 평온한 상태를 경험하게 되었다.
마음이 평온한 상태는 무감한 상태라든가 처진 상태, 어쩐지 가식적인 상태와는 다른 것이었다. 마음이 평온한 상태는 그저 편안한 느낌이 드는 상태였다. 기쁜 것은 기쁘고 슬픈 것은 슬프다. 즐거운 것은 즐겁고 화나는 것은 화난다. 단지 그 감정이 몸과 마음을 온통 지배해서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이유 없이 불안해서 견디기 힘든 상태가 되지 않는다. 그제야 알았다. 나 그동안 정말 힘들게 살았구나. 훌쩍.

“어쩌면 우리는 살면서 끝없이 불안을 내면화하는 것은 아닐까.”
내 불안은 대부분 유전적이고 성격적인 특성 때문이기는 하나, 불안장애 치료를 받으면서 돌아보니 나 말고도 많은 이들이 불안한 것 같았다. 그들은 나처럼 미래에 대해 불안해했고, 일어날 수도 있을 사건과 사고를 불안해했고, 일을 하면서도 불안해했고, 놀면서도 불안해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건 왜일까
왜긴, 인스타그램만 스크롤해 보라. 완벽한 비율과 새하얀 피부, 건치를 자랑하는 연예인들의 사진이 끝없이 나열되니, 잡티 투성이에 비율이랄 것도 없는 나는 그냥 사람이 아닌 것만 같다. 이 나이에 1억 연봉이 안 되는 내 인생 역시 망한 게 확실한 것 같고, 지금까지 별 부족함 없이 잘 먹고 잘 살았는데도 억울함과 분노가 밀려온다. 아이 키우는 데 이래라저래라는 또 얼마나 많은가. 이래도 욕을 먹고 저래도 욕을 먹으니 차라리 아이를 안 낳고 말겠다는 결심이 밀려온다(고 하기에는 나는 이미 두 명이나 낳고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넘쳐난다. 인간관계 유지하는 법, 인간관계 손절하는 법, 병에 걸리지 않는 법, 병을 빨리 발견하는 법, 병에서 낫는 법, 돈을 모으는 법, 돈을 버는 법, 돈을 굴리는 법, 돈을 투자하는 법, 화장실의 곰팡이를 제거하는 법, 창틀에 낀 흙먼지를 제거하는 법, 창문을 닦는 법, 수건을 개는 법, 좀 더 젊어 보이는 법, 다시 태어나는 수준의 화장법과 헤어 스타일, 퍼스널 컬러, 체형 극복, 저탄고지 다이어트, 간헐적 단식 다이어트, 퍼스널 트레이닝, 러닝…….
불안이 심한 통제형의 성격인 나는 어릴 때 생활의 지혜를 정말 좋아했다. 서바이벌 가이드도 열심히 읽었다. 그런 것들만 달달 외워두면 어떤 불상사가 닥쳐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온 세상이 생활의 지혜, 인생의 지혜, 생존법에 미쳐 있는 것만 같다. 왜냐하면 다들 ‘잘’ 살고 싶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충’ 사는 것도 ‘잘’ 하고 싶어 한다. 이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건가.
등을 둥글게 말고 누워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내 아이들을 본다. 이 아이들은 저 손바닥만 한 세상에서 무엇을 배울까. 거기에서 배우는 것은 과연 좋은 것들일까. 내 아이들도 끝없는 불만족과 지속적인 자기계발의 압박, 그리고 불안을 내면화하는 것은 아닐까.

“이분법에서 벗어나자,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정해지자.”
불안장애를 치료할 때 불안에 관한 책들을 여러 권 읽었다.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그 책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를 옥죄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완벽히 옳은 것도 없고 완벽히 그른 것도 없다. 마찬가지로 성공도 없고 실패도 없다. 하나를 성공한다고 모든 것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과정일 때가 대부분이다. 무엇보다 성공 후에도 삶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어떤 것을 성공이라 부르고 어떤 것을 실패라 부를지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므로 옳음과 그름, 성공과 실패 너머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나는 박혜윤의 책 <도시인의 월든>에 나오는 좋아하는 구절을 떠올려 입 안에서 발음해 본다.
‘아이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으면 미래에 어떻게 될까? 지금 돈을 벌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상상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공포에 질리게 만든다. 하지만 공부를 하거나 하지 않고, 돈을 벌거나 벌지 않고 대가를 치르는 양자택일의 선택이 아니라 그런 선택 밖의 삶을 떠올리는 것도 상상으로 가능하다.’
어쩌면 모든 것은 상상력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불안장애를 위한 처방 하나가 더 있다. 사실 나는 이쪽이 더 마음에 드는데, 그건 스스로에게 다정해지라는 것이다.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붙이지 말 것. 완벽하지 않아도, 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세상이 정한 기준에 맞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자기 합리화를 하거나 자아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에게 다정해질 것. 불안에 사로잡힌 나 자신을 다정하게 어루만져 줄 것.
놀랍다. 결국 다정은 불안도 이기는 것이다.

글. 한수희(작가)
영화연출을 전공하고, 잡지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