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정지혜의 책장]스스로를 구하는 세 권의 책

'나'를 지키는 브레이크가 되어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정지혜 독립서점 '사적인 서점' 대표, 작가

살다 보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 가고 싶은 순간이 있지요. 마음의 경고등에 빨간 불이 들어온 걸 무시하고 달리면 내 안의 중요한 무언가가 망가질 것만 같아 두려우면서도, 막상 쉬어 가려고 하면 뒤처지는 게 아닐까 걱정되고… 저 역시 불안한 마음을 안고 경고등 앞에 멈춰 선 날들이 있습니다. 세 번의 멈춤을 통해 제가 배운 것은, 나는 힘이 들 때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입니다. 지친 나를 위해 기꺼이 쉬어 갈 수 있는 용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는 동안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요. ‘나’를 지키는 브레이크가 되어 준 세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1. 송은정, <천국은 아니지만 살 만한>

대학 졸업과 동시에 취업한 회사에서 격무와 박봉에 시달리던 저자는 재취업이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끊고 잠시 쉬어 가기로 합니다. 그가 이직 대신 선택한 것은 북아일랜드의 장애인 공동체 캠프힐. 장애인과 함께 생활하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숙식을 제공받고 약간의 용돈까지 제공해 주는 곳이지요.

 

저자는 캠프힐에서 처음으로 ‘갭 이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잠시 학업을 멈추고 여행, 유학, 자원봉사 등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경험을 쌓는 시간을 사회가 너그러이 기다려 주는 거예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학에 입학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곧바로 취업이 기다리는 한국인의 생애 주기 안에서 갭 이어는 좀처럼 떠올리기 어려운 선택지죠.

 

서른을 코앞에 두고서야 나는 뒤늦게 내 인생의 첫 번째 갭 이어를 갖게 됐다. 사람들의 우려처럼 돈도 경력도 학업도 쌓지 않고 있는 나라는 인간은 지금 정체되어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곳에 온 이후 나는 무언가를 꾸역꾸역 채워 넣는 대신 내 안에 고여 있던 편협함을 쉼 없이 흘려보냈다. 그리하여 마침내 텅 빈 상태가 되었을 때 그 자리에 가장 먼저 무엇을 쌓아 올리면 좋을지, 그런 즐거운 고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 송은정, <천국은 아니지만 살 만한> 중에서

 

저도 갭 이어, 아니 갭 먼스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저의 첫 직업은 출판사 편집자였어요. 오랜 꿈이었고 일해 보니 적성에도 잘 맞았지요. 좋아하는 작가와 함께 일한다는 기쁨에 취해, 내가 만든 책이 전국의 서점에 진열된다는 뿌듯함에 취해, 매일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도 그게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첫 사회생활이다 보니 요령도 모르고 한계도 몰라 끝 간 데 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였지요. 결국 2년도 채우지 못하고 방전이 된 저는 재충전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100일간의 방학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곰도 100일이면 사람이 된다는데, 미련 곰탱이처럼 일하느라 몸도 마음도 망가진 나를 다시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거든요.

처음 한 달은 고향 집에 내려가 푹 쉬었습니다. 주어진 일이라고는 먹고 자는 일밖에 없는 사람인 것처럼 한 달을 보내고 나니 마냥 쉬는 것도 슬슬 지겨워지더라고요. 다시 서울로 돌아와 이번에는 닥치는 대로 북토크를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편집자가 꿈이었고, 적성에도 잘 맞는 일 같았는데, 왜 이렇게 소진된 건지 모르겠다고. 한 달을 정신없이 쏘다녔지만 어느 곳에서도 속 시원한 대답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달에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편집자로 일하는 동안 나는 어떤 점이 좋았고 어떤 점이 견디기 힘들었는지 스스로에게 따져 물으면서 알게 되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 좋아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세상에 ‘소개하는’ 것이었다는걸요. 때마침 홍대 앞 큐레이션 서점 ‘땡스북스’의 직원 채용 공고가 올라왔고, 100일간의 방학이 끝남과 동시에 저는 책을 만드는 사람에서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약 스스로 비우고 채우고 질문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저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요.

 

2. 마스다 미리, <주말엔 숲으로>

<주말엔 숲으로>는 프리랜서 번역가 하야카와가 시골로 내려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만화책입니다. 도쿄에서 팍팍한 삶을 살고 있는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주말이 되면 시골에 살고 있는 하야카와를 찾아갑니다. 그런 친구들에게 하야카와는 밤의 숲길을 걸으며 “헤드라이트는 2-3미터 앞을 비추는 거야. 숲에는 돌이나 나무뿌리가 있어서 어두울 때는 발밑보다는 조금 더 멀리 보면서 가야 해.”라는 태평한 소리를 잘도 하는데요.

 

숲에서 나눈 대화는 다시 도쿄의 전쟁터 같은 직장으로 돌아온 친구들에게 예상치 못한 느낌표를 안겨줍니다. 당장에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발밑이 아닌 더 먼 곳을 바라보게 되고, 무례한 사람에게 저주를 퍼붓다가도 인간에게만 주어진 상상력을 이런 일에 사용하는 건 아깝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고쳐먹으니까요. 팍팍한 일상을 살아가는 친구들에게 하야카와의 말은 숲에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의 두 번째 방학은 군산에서 날아든 메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안식년을 맞이한 사장님을 대신해 책방을 맡아 운영해 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내용이었지요. 때마침 사적인서점 시즌 1을 종료하고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져 있을 때라 삶의 중심을 서울에서 군산으로 옮겨 보기로 했습니다.

 

동네 지리나 익혀 볼까 싶어 산책을 나선 첫날,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놓인 평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낮의 볕은 따사롭고, 시간은 남아돌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창피할 게 뭔가 싶어 평상에 벌러덩 드러누웠어요. 마지막으로 하늘을 올려다본 게 언제였지 싶더라고요. 서울에선 뭔가를 움켜쥐려고 바쁘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텅 빈 것 같았는데, 여기선 태평하게 누워 하늘만 보고 있어도 더없이 충만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뒤로 틈만 나면 평상에 누워 구름멍을 때렸어요.

 

마음이 답답하거나 울고 싶어질 때면 해가 질 무렵에 저만의 비밀 장소를 찾아갔습니다. 등 뒤로는 푸르른 숲이, 눈앞에는 고요한 바다가 펼쳐지는 나무그네에 앉아 서해 바다 너머로 해가 기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제가 지나치게 걱정하고 슬퍼하는 모든 것들이 하찮게 느껴졌어요. 그래, 이런 게 행복이지. 행복이 뭐 별 건가 싶더라고요.

 

3. 하미나, <아무튼, 잠수>

제 인생의 세 번째 방학은 병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앞의 두 번의 방학과는 다르게 자의가 아닌 타의였고, 선택이 아닌 강제였어요. 항암치료를 하느라 어쩔 수 없이 일을 쉬어야만 했거든요. 치료를 하는 동안 저는 제 몸이 폭삭 늙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소화 능력이 떨어져 평소처럼 밥을 먹을 수 없고, 기력이 없으니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지요. 

 

<아무튼, 잠수>는 공기통 없이 자기의 숨만큼만 바다에 잠수해 있다가 올라오는 스포츠 ‘프리다이빙’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하미나 작가는 우울증을 오래 앓았습니다. 첫 책을 쓰는 동안 그는 익사의 이미지를 자주 떠올렸다고 해요. 어두운 물속에서 잃어버린 열쇠를 찾으려 애를 쓰는 모습이었지요. 책을 쓰며 더 버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프리다이빙을 하러 바다로 갔습니다. 익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익사의 고통을 선택한 셈이에요.

 

프리다이빙은 책을 쓰는 일과는 달랐다. 지친 몸을 무시하고 억지로 끌고 가서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의지로, 최선을 다해서, 스스로 몰아붙여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에 익숙했다. 프리다이빙은 그렇게 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힘을 줘서 움켜잡을 수 없는 게 바다였다. – 하미나, <아무튼, 잠수> 중에서

 

의지로, 최선을 다해서, 스스로 몰아붙여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에 익숙했던 하미나 작가는 프리다이빙 앞에서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프리다이빙을 하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이 필요했거든요. 못하는 연습, 내려놓는 연습, 힘 빼는 연습.


하미나 작가처럼 저 역시 아프기 전까지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열심히 노력하면 다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을 앓으면서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걸, 아니 세상을 산다는 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거예요. 그동안 제가 얼마나 억세게 운이 좋았던 건지도요.


신기한 건 제가 그 과정을 겪으면서 엄청 슬퍼하고 좌절한 게 아니었다는 거예요. 처음엔 힘들었지만 나중엔 오히려 홀가분했습니다. 뭐든 내 노력으로 커버할 수 있다고 믿었을 땐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온전히 제 몫인 것 같아 괴로웠거든요. 생각해 보니 과거의 나는 참 오만한 사람이었구나 싶더라고요. 그 어떤 변수까지도 내가 다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거니까요. 마음의 여유라는 건 뭐든 더 많이 가져야만 가능한 건 줄 알았는데, 포기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줄이야!


<아무튼, 잠수>는 프리다이빙의 아름다움에 관한 글인 동시에 두려움에 관한 글이자 두려움을 넘어서는 해방에 관한 글이기도 합니다. 두려움을 극복해야 할 때, 대체로 우리는 꾹 참고 버티는 방법만을 생각하기 마련이잖아요. 무서워서 한 발짝도 더 뗄 수 없을 때,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새로운 힌트가 이 책 안에 담겨 있습니다.


글. 정지혜

한 사람을 위한 ‘사적인서점’ 운영자. 좋아하는 마음이 다음엔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기대하며 살아간다. 책 <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와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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