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효용을 강조하자면 끝도 없다. 인간의 기억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믿을 수 없으니까. 지난 주 어느 날 무엇을 했더라? 떠올려 봤을 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요즘은 누가 “점심 뭐 먹었어?”라고 물어도 바로 답을 못할 정도로 일상은 쉽게 사라진다. 기록의 중요성을 맘속 깊이 알면서도 ‘나는 왜 기록을 제대로 못할까?’에 대한 이유를 떠올려 보면 잠자리에 누워 하루를 돌이켜 볼 때 기록할 만큼 유의미하고 정성스러운 하루를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늦잠 자고 일어나 대충 먹고, 누워서 숏츠 보다가 하루 다 갔음.’이라고 일기장에 쓰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기록은 분명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다. 무엇을 기록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일단 ‘왜 기록을 해야 하고, 나는 이 기록으로 무엇을 얻고 싶은지’를 생각해 봐야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기록 중독자들은 왜 기록하는 것이며, 꾸준히 기록을 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지난해 ‘기록 러버’들을 서른 명 정도 만났다. ‘베터’라는 기록 성장 플랫폼에서 ‘자기만의 기록’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베터의 기록 아카이빙’을 쌓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그때 만났던 사람들에게서 들었던 공통적인 이야기이다.
1. 가볍게 자주 써야 한다
오래 기록을 해온 사람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는 것이 바로 ‘가볍게 기록하기’이다. 두꺼운 노트에, 정해진 틀로 대단히 멋진 것을 길게 기록하려 하다 보면 꾸준히 쓸 수 없다. ‘베터’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던 작가 뜨스구스님은 평소 사소한 메모를 자주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간단히 적은 메모들을 모아두면 긴 글로 쉽게 엮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를 키우면서 생각나는 것을 적어둔 메모를 글로 정리해 인스타그램이나 베터에 기록했다. 이를 다듬어 뉴스레터를 내고 다시 엮어 책으로 출간했다.
‘가벼운 기록’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 일상에서 반복되는 것이 있는지 관찰해야 한다. 매일 하는 것이 커피 마시는 일이라면 여기서 시작해도 좋다. 오늘은 어디서 무슨 커피를 마셨는지, 왜 이 매장의 이 커피 메뉴를 선택했는지 동선과 생각들을 써보는 것이다. 이렇게 일주일을 기록하면 나중에는 ‘내가 어떤 커피를 마셨고 이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가 남는다. 그런 거 남겨서 뭐 하냐고? 매일 점심 후 마신 커피와 맛, 그때 함께 나눈 대화, 혼자 한 생각들을 나중에 들춰 보면 그 역시 나만의 영감이 되고, 소중한 기록물이 된다.
2. 쓰다 보면 이뤄진다
무슨 ‘시크릿'(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 부류의 주술이 아니다. 직장을 다니다가 ‘인생 2막’으로 도자기 페인팅 공방을 운영하는 빛나님은 어릴 때부터 버킷 리스트나 미래에 해야 할 일을 포스트잇이나 다이어리에 썼다고 한다. 직장 생활을 할 때 ‘직장인으로 얼마나 오래 일할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던 그녀는 세세하게 월 단위로 ‘나의 공방’을 만들 때 얼마의 수익이 날지, 아이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육아할 수 있고, 회사에 다닐 때와 내 가게를 운영할 때의 차이점과 장단점이 무엇인지를 보고서처럼 적어봤다고 한다.
심지어 ‘미래의 배우자상’을 세세하게 기록하기도 했는데, 지금 남편을 보면 과거에 적었던 이상형과 상당 부분 닮아 있다고도 말한다. 혼자 머릿속으로 어렴풋이 꿈이나 목표를 가지는 것보다 글로 쓰면서 정리를 할 수 있고, 구체화한 글을 주변에 두고 자주 보면서 그에 가까워지는 노력을 해보는 것이 바로 기록의 효용인 것이다. ‘나는 언젠가 내 가게를 할 거야’라고 생각만 하는 것과, 그 꿈을 적어보고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차근히 글로 써본 사람은 다른 미래를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3.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워내기 위해서
‘기록을 왜 할까?’라고 질문하면 대부분이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머릿속에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지 않기 위해 기록을 할 때도 있다. 인간의 머릿속 기억 창고는 한계가 있다. 묵은 기억을 전부 끌어안고 있으면 새로운 것이 들어올 자리가 부족해진다. 사람이 어린 시절 기억은 오래 기억하면서 가까운 과거(어제, 일주일 전, 한 달 전)는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어릴 때의 기억이 더 인상적이고 감각적이기도 하지만 과거의 기억을 잘 털어내지 않아서 새로운 것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침 일기를 쓴다고 한 많은 이들이 머릿속에 부유물을 털어내고 하루를 산뜻하게 시작하기 위해 기록을 한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기록은 ‘미래의 나에게 하는 당부’이기도 하다. 과거를 털어내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 중요한 것들은 머리 밖에 기록물로 남겨두고 머릿속은 한 번 비워내는 것이 필요하다.
4. 똑같은 매일도 특별해진다
에세이스트 비비언 고닉의 책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를 보면 평범한 뉴욕의 거리를 기록한 에세이가 있다. 정말이지 서울 지하철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 정말 특별한 거 없는 어느 저녁 동거인과 함께 있지만 함께라서 오히려 외로운 날, 고닉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의 말이 의미 없는 저녁 시간에 선명함을 부여해 준 덕분에 삶은 조금 더 견디기 쉽게 느껴진다. 도시에서 사회적 유동성이란 누구도 다른 누구에게서도 도망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가 이렇게 쓰지 않았다면 그날은 아주 흔한 어느 날 밤으로 지나서 기억에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 본 것을 <외면 일기>라는 이름으로 기록한 프랑스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는 관찰과 기록이란 삶에 광택을 내는 일이라고 쓰기도 했다. “그가 개입하기 전까지는 그 보물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소급 효력을 가지면서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의 발견이다.”(<외면일기> 中) 우리가 매일 흘려보내는 시간이란 사실 보물인지도 모른다. ‘이런 하루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싶은 하루도 내가 발견하고 통찰해서 글로 쓰는 순간 보물이 된다.
5. 기록하기 위해 일을 만든다
기록에 굳은살이 어느 정도 배긴 기록 우수자들은 ‘기록할 일’을 만든다고 한다. 무슨 일을 할 때 ‘베터에 오늘도 써야 하니까 해내야지’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운동, 공부, 공간 탐방 등 나만의 아카이빙을 만들기 시작하면 무언가 하기 싫어질 때마다 ‘기록하기 위해 이걸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단 운동 기록을 하기 시작하면, 운동하기 싫은 날에도 ‘기록해야 하니까 10분이라도 하자’라고 생각이 든다고 한다.
‘의지력 강한 사람이나 그런 거지’라고 코웃음 치지 말고 일단 한 번 인스타그램, 블로그, 베터나 아이폰 일기장 등등 나만의 기록 창구에 꾸준히 하고 싶은 일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보자. 마음으로만 하는 ‘나와의 약속’이 아니라 남들에게 공표하는 약속을 만들어 두면 스스로를 좀 더 압박할 수 있다. 기록을 위한 실행은 우리를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만든다.
과거의 내가 했던 생각과 내가 한 일들을 그냥 흘려보내면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하지만 기록하는 순간 그때의 내가 남는다. 내가 원하는 방향을 기록하고, 나를 다시 붙잡는 역할을 과거의 기록들이 해주게 된다. 1년 전 내 꿈은 무엇이었고, 내 상태는 어땠는지, 무엇을 이루고 싶었는지. 기록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미래의 나, 보고 있니? 나 지금 이런 생각 하고 있어.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현재의 내가 이만큼 노력하고 있어. 너는 얼마큼 거기에 도달했니.” 결과는 그냥 나오지 않고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있다. 매일의 일상은 모두 그 과정이다. 방향과 과정을 기록하는 일은 시간을 충만히 보내고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 행위다. 기록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글. 김송희
<빅이슈코리아> 편집장. 전 <씨네21> 기자, 한겨레 카카오 등에 온 · 오프라인의 미디어에 대중문화 글을 기고했다. 책과 영화 관련해 강연 및 연재 활동 중. 고양이 후추의 집사. 인스타그램 @cheeseda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