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하기만 한 날씨에 도무지 계절감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폭설과 함께 성큼, 겨울입니다. 출근해 내리는 눈을 보며 매년 듣던 캐롤 모음집을 틀었습니다. 캐롤을 들어야 또 한해가 끝나가고 있음이 실감 납니다. 이때쯤 습관이 되어버린 말을 내뱉습니다. “시간 참 빠르다.” 20대 때에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마냥 들뜨고 설렜던 것 같아요.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길 것만 같고 재밌는 추억을 만들어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벌써 올해도 끝이네’하며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시간의 속도에 놀라기에 바쁩니다. 재미있고 특별한 일을 찾기보다 혼자 정리할 시간을 확보하게 됩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우르르 휩쓸리기보다 조용한 공간에서 내가 고른 책의 작가와 우리만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즐깁니다. 오롯이 나다운 한 해를 마무리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소중한 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중요한 만큼 나 자신과 보내는 고요한 시간도 중요합니다. 시끌벅적한 연말, 나와의 조용한 시간을 보내길 원하는 분들을 위한 세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1. 박솔미 <겨울 마침표>
박솔미 작가의 <겨울 마침표>는 응원이 필요한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어느새 한해의 끝에 서 있게 된 우리는 종종 후회나 자책을 합니다. 1년 동안 내가 이루고, 해낸 일들보다 하지 못한 것, 잘못한 것만 떠올리면서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라는 말은 자신을 혼내라는 뜻이 아닌데 많은 이들이 돋보기를 들이대고 잘못된 부분들을 찾아내려 애씁니다. 그리고 반성문을 써요.
박솔미 작가의 책을 읽고 있으면 기운이 납니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거두고 ‘그래! 이만하면 잘했어!’라고 칭찬의 말을 건네게 돼요.
“올해 작심했던 일들 중에 못다 이룬 목록이 있을 것이다. 괜찮다. 계절은 냉정한 결승선이 아니라 너그럽게 돌고 도는 연결선을 따라 흐르니까. 겨울에 충분히 다독이고 나면, 우리는 새 봄에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목표를 향해 걸어갈 수 있다. 잔뜩 겁먹은 나에게 늦었어도 괜찮으니 가까이 와 앉으라고 했던 선배들처럼, 우리의 불안에도 편히 한숨 돌려도 된다고 따뜻하게 말해주자.”
저는 이 책을 읽은 후 제게 한없이 너그러워졌습니다. 스스로에게 너그러운 사람은 게으른 사람, 자신에게 진 사람, 한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던 저였습니다. 그렇다고 딱히 치열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치열하게 살지 못하는 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최근 힘든 일을 겪고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자 명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시작한 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아 눈에 띄는 큰 변화를 겪진 않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배운 건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모르는 건 아니었습니다. 아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실제로 제가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아주 큰 착각이었습니다. 명상을 해오면서 저는 그동안 저를 사랑하는 척만 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진심으로 스스로를 사랑하고 품어주고 안아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알게 되고 얼마 안 있어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직전의 깨달음에 그녀의 글까지 더해져 저는 저 자신을 그 누구보다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이루지 않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지요. 2024년 한해를 그저 무사히 잘 보낸 자신을 칭찬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2025년을 맞이하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이 맞춤 선물이 되어줄 거라 생각합니다.
2. 고수리 <까멜리아 싸롱>
이번 해는 틀렸어! 와 같은 마음이 드는 시기가 바로 연말이죠. 연초에서 연말로 갈수록 모든 것이 흐릿해지기 마련입니다. 연초 계획하고 다짐했던 것들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저 멀리 떠내려간 지 오래고요. 연초에는 마음이 조금 흐트러지더라도 다시 시작할 의지가 생기는데 연말은 아무리 짜내도 좀처럼 의지가 발휘되지 않습니다.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1년 동안 여전히 매듭짓지 못한 관계, 찝찝한 관계들이 있습니다. 나를 위해 상대를 용서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게 잘 안되죠. ‘왜 나만?’ 하는 억울한 마음도 듭니다. 계획도, 다짐도, 관계도 내 뜻대로 되지 않은 것 같아서,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된 것 같아서 다소 기운 빠지는 연말을 맞이할 것 같은 분들에게 고수리 작가의 <까멜리아 싸롱>을 추천하고 싶어요. 누구보다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이 책의 등장인물들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인 <까멜리아 싸롱>에 닿게 되고 그곳에서 겪은 일들을 통해 희망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거든요. 가볍게 희망을 소재로 삼은 힐링 소설이 아니라 읽고 나면 심한 독감을 앓고 난 것처럼 오히려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힘을 내게 해주는 그런 소설입니다.
“안녕, 까멜리아 싸롱의 아침. 아무리 긴 밤이라도 아침은 온다.”
우리의 삶은 한 번뿐이어서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 있는데요. 이런 문학 작품을 통해 대신 경험하면서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 같아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이 세상을 전과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엉망이라 느껴졌던 제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잡혔습니다. 새로운 문을 열고 새로운 곳으로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전보다 조금 더 세상과 나에게 다정해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저와 제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저라는 사람이 까멜리아 싸롱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도요.
3. 무과수 <안녕한, 가>
작가 무과수의 여름, 가을, 겨울, 봄. 사계절을 지내며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을 사진과 글에 담아 엮은 책입니다. 작가의 사계절을 차례대로 읽다 보면 읽는 사람의 계절의 순간들도 함께 떠오릅니다. ‘맞아, 올여름 정말 더웠지, 나도 가을에 여기 갔었는데. 이번 겨울엔 이걸 못 먹었구나’ 하면서 1년을 돌아보게 됩니다. 한해를 함께 마무리하는 기분이 들죠.
마무리와 동시에 시작점에 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요. 이유는 바로 겨울이 아닌 ‘봄’에서 끝나기 때문입니다. 보통 책에서 계절을 다룰 땐 봄에서 시작해 겨울에서 끝나는데 이 책은 봄에서 시작하지 않고 봄에서 끝을 냅니다. 저는 이점이 좋았어요. 계절이 끝없이 이어지는, 책은 끝이 났지만, 이후의 삶이 계속되는 것 같은 마무리가 왠지 모르게 작은 힘이 되어주더라고요. 자연스럽게 내년을 준비할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요. 작가의 세상을 바라보는 소박하고 따뜻한 시선이 저를 안심시키기도 했습니다. 꼭 뭐 대단한 걸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건강하고, 잘 먹고, 안녕한 삶. 그것만으로도 충만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음에 절로 감사하다. 식사를 마치고 안나가 끓여준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글을 쓰는데, 나도 모르게 마음이 벅차오르며 울컥했다. 유독 길었던 긴 겨울의 터널을 잘 지나왔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그토록 기다렸던 봄과 마주하게 된 기쁨 때문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희미함 속 단단한 확신이 들었다.”
12월에는 왜인지 꼭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싶어집니다. 매년 그 계획들이 끝맺어지지 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죠. <안녕한, 가>를 읽으면서 내년 계획을 세워보시길 추천합니다. 더는 스스로를 괴롭힐 욕심 가득 찬 계획을 세우지 않게 될 거예요.
글. 황지혜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서점 ‘지혜의서재’를 운영하고 잠 못 이루는 이들을 위해 책 이야기를 하는 팟캐스트 방송 <잠 못 이룬 그대에게>를 진행하고 있다.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도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