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방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섭니다. 돌보지 않아 털이 수북하게 자라난 내면의 그림자가 소파에 앉아 있습니다.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반복해서 방문을 열고 닫으며 일상을 살아갑니다. 정유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안경>의 한 장면입니다. 우리는 바쁘다는 이유로 내면을 돌보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곤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감정을 외면하는 지경에 이르곤 하죠. 정유미 감독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기 쉬운 자기 수용의 과정을 애니메이션을 통해 그려냅니다. 작품을 통해 내면의 치유와 성장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정유미 감독을 만나 마음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정유미 감독
2006년 <나의 작은 인형 상자>를 만들며 데뷔했고, 2009년 <먼지아이>로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받는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주인공의 심리적 여정을 연필 드로잉으로 표현한 단편 애니메이션 <안경>이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단편경쟁 부문에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초청받았다.
올해 ‘칸 영화제’와 ‘자그레브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등 다양한 영화제에 초청받으셨어요. 요즘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계신가요?
4년 전부터 시작한 작품을 완성해서 영화제에 다녀왔고, 해당 작품을 책으로 출간하는 작업도 하고 있어요. “제 일상은 늘 작품을 만들거나 구상하는 시간으로 채워져요.” 단편 애니메이션을 작업하다 보니, 주로 혼자 시간을 보내는데요. 최근에는 <세바시>에 출연하기도 했고, 지금 인터뷰를 함께하는 것처럼 작업 외의 활동들도 조금씩 진행하고 있어요.
곧 4분기에 접어드는 시점이에요. 어느 때보다 바쁜 한 해를 보내셨을 것 같은데, 올해를 지나온 소감이 궁금해요.
작업실을 벗어나 다양한 곳을 가고 경험한 한 해였어요. 애니메이션 작업이라는 게, 작업 시간이 긴 편이에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혼자 작업하다 보니 소수의 사람들과만 소통하면서 지내거든요. 작년까지 그렇게 살다가, 올해 새 작품들이 다양한 곳에서 상영이 되어서 여행하듯이 많은 곳을 다녀왔어요. ‘세바시’에 출연한 것도 원래 같으면 안 했을 텐데, 쉬는 기간 동안 사람들과 소통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서 용기를 냈어요.
감독님의 작품 중에 <안경>은 내면에 존재하는 자아들과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심리적 성장 서사를 담고 있어요. 해당 주제로 작품을 진행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자기 수용’이라는 주제 측면에서는 기존 작업의 연장선에 있지만, <안경>이 특별한 이유는 투자 방식에 있어요. 보통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이나 영화진흥원의 지원 사업을 통해 투자를 받아요. <안경>의 경우는 디자이너 브랜드 김해김(Kimhēkim)의 투자를 받아 진행했어요. 아이템 측면에서는 작품 안에서 시력검사가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하는데요. 제가 집이라는 형태나 안으로 들어가는 구조를 좋아해요. 시력검사를 할 때 눈을 깜박이지 않고, 화면 속 ‘집’ 그림을 계속 바라봐야 하잖아요. 흥미로웠고, 내면적인 이야기를 풀어가기에 적합한 소재라고 생각했어요.
같은 주제로 작품을 이어가다보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다듬어지기 마련이잖아요. 초기 작품과 최근 작품을 비교해보면 어떤 부분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세요?
제 작품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자기 수용’이에요. 무의식적으로 해당 주제가 끌리더라고요. 초기와 최근을 비교해보면 엔딩에서 조금 더 수용의 표현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요. 개인적인 경험들이 쌓여 자연스럽게 반영되는 것 같은데, 이후에 하게 될 작업에도 자기 수용이라는 주제는 이어질 거예요.
대부분의 심리상담이 자신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요. 내면을 들여다보는 주제의 작품 활동이 감독님의 마음성장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시나요?
내면의 불편함을 인지하고,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생각하는 과정이 필요했어요. 그 에너지가 작업으로 이어졌죠. 사실, 내가 느낀 감정이나 나라는 사람의 형태가 모호하잖아요. 작업을 통해 표현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조금 선명해졌어요. 내 감정이지만 미처 몰랐던 부분을 발견하기도 했어요. 조금 더 깊은 내면을 꺼내 보고 싶기도 해요.
이야기를 듣다보니 감독님의 20대는 어땠는지 궁금해져요.
큰 성향은 바뀌지 않더라고요. 저는 혼자 하는 게 편한 사람이고, 앞에 나서는 자리에서는 긴장도가 높고 편하지 않아요. 20대에는 더 심했죠. 불안증이 올라오는 일들을 피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더 작업에 몰두했던 것 같아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제 성향에 잘 맞았어요. 20대는 서울에 혼자 올라와서 살면서 심적으로 쉽지 않은 시기였어요. 그때 산책을 많이 했어요. 하루에 3만보씩 걸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내면의 불안함을 어찌할지 몰라서 그랬던 거죠. 방법을 모르니 할 수 있는 걸 했어요. 그림일기도 그렸는데, 그걸 모아서 만든 작품이 <파라노이드 키드>에요.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가 느낀 감정을 제대로 인지하기 위한 감독님만의 방법이 있나요?
참 넓고 깊은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는 질문인데요(웃음). 저도 상담을 받아봤어요. 그 과정이 도움이 많이 됐는데, 무엇보다 ‘알아차림’이 중요해요. 어떤 감정이 생겨날 때, 몸이 먼저 느끼거든요. 좋아하지 않는 감정들은 신체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게 해요. 우리가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 배가 아프잖아요. 불편한 감정도 비슷해요. 예전에는 부정적인 감정들은 느끼면 안 될 것 같아서 억눌렀는데, 최근에는 그런 감정이 들면 멈춰서 느껴보려고 해요. 그 감정이 내 안에서 비롯된 것이고, 내가 지금 힘들다는 걸 인지하면 오히려 회복이 더 빨리 되더라고요.
마음이 무너지는 날, 위로가 되어주는 문장이나 말, 또는 콘텐츠가 있나요?
지금 떠오르는 건 마이클 브라운의 「현존 수업」이라는 책이에요. 감정을 인지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인데요. 우리가 어떤 감정이 확 올라올 때, 보통 생각으로 이어지거든요.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부정적으로 흘러가죠. 그럴 때 회피를 위해 자동 반사적으로 나타나는 행동을 멈추고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호흡하는 방법을 알려줘요. 15분 호흡법인데,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감정과 몸의 반응도 일종의 패턴이라, 인지하게 되면 대응 방식도 공식처럼 생겨요. 〈하루의 사랑 작업〉이라는 유튜브 채널도 추천하고 싶어요. 자기비판 성향이 강한 분들이 보면 도움이 될 거예요. 자기비판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보면 도움이 될 거예요.
‘마음 성장’이라는 말을 감독님만의 생각으로 정의해본다면 어떤 의미인가요?
‘지금 이 순간의 나와 함께 하는 것’, 즉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는 상태라고 생각해요. 특출난 능력이 없어도, 내 모습이 세상이 추구하는 방향과 다르더라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범위가 더 커지기를 바라요.
감독님이 앞으로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궁금해요.
시나리오를 쓰는 단계인데, 처음으로 장편을 시도해보려고 해요. 여러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고, 기존에는 크게 필요하지 않던 조직화나 시스템화가 필요해질 거라 두려운 마음도 있어요. 하지만 어떤 일에서든 자유로워지려면 극복의 과정이 필요하잖아요. 지금이 그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