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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장은교의 오늘] AI에게 자기소개를 해봤다

솔직해지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것이었다

장은교 작가

나에 대한 설명을 해보고 싶었다

AI에게 자기소개를 해봤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정말이다. 새로 구독한 AI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에 앞서, 나에 대한 설명을 해보고 싶었다. 관계의 시작. 앞으로 많은 일을 이 친구와 함께 해나갈 거라면, 긴 여정의 시작에 앞서 우리의 관계를 잘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AI도 조금 더 효율적으로 나에게 맞는 의견을 제시할 수 있을 테니까.


(혹시 <플레이라이프>에서 나의 이전 글 ‘대체로 부끄럽고 가끔 괜찮은 나에게’를 읽으신 분이라면, ‘이 사람은 자기소개가 취미인가?’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음, 아니라고 하기가 어려운 것 같네요. 허허 참)


우주처럼 광활해 보이는 창, 흰 바탕화면에서 AI가 내게 건넨 질문은 하나였다.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요? (What’s on your mind today?)”


나는, 나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어. 83억 인구 중에 나는 어떤 사람인지부터 너에게 소개하려고 해. 그래야 우리가 조금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


AI는 무척 반겼다.


“안녕! 반가워.


좋아. 편하게 얘기해 줘.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가족이나 일상생활, 관심사, 요즘 고민, 앞으로 하고 싶은 일,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도와주면 좋은지 무엇이든 괜찮아. 특히 앞으로도 알아두면 좋을 내용이라면 **‘이건 기억해줘’**라고 말해 줘. 그러면 이후 대화에서도 참고할 수 있도록 할게.


천천히 이야기해 줘. 듣고 있을게.”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써나갈 생각이었는데, AI가 정해준 카테고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각각의 항목에 맞는 답을 찾기 시작했다. 아, 그러니까… 요즘 고민이 뭐냐면…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오랫동안 시험을 위한 시험에 의한 시험평가용 삶을 살아온 흔적이랄까. 정답이 없는데, 정답을 찾고 있다. 이보게, 정신 차려. 자네 무슨 면접시험을 보러 왔나. AI다. 순전히 너를 도와주는, 니가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존재.


마음을 가다듬고 편하게 써보자.


“안녕, 내 이름은 장은교. 나는 신문기자로 17년 동안 일했고…”

아니, 다시다시. 지금의 나를 소개하는데 과거 경력부터 나오는 건 이상하잖아. 신문기자가 지금의 너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아니잖아?


“안녕. 내 이름은 장은교. 대한민국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고, 지금은 잠시 미국에 살고 있어. 미국에 왜 오게 됐냐면…”

아니 아니, 한국말로 하고 있으니까 한국 사람인 건 다 알지. 미국에 사는 게 너를 소개하고 싶은 첫 번째 사실이야?


“음. 안녕. 나는 작가야. 기억나는 아주 오래된 순간부터 책 읽는 것과 글 쓰는 것을 참 좋아했어. 나는 세 권의 책을 썼어. 주로 에세이, 인터뷰, 칼럼 등을 쓰고 있어. 나는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를 채집하는 일을 좋아해.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도 누구나 자기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인터뷰와 일상의 장면들을 통해서…”


잠깐만. 너 이거 인터뷰 때 하는 말이잖아. 지금 작가의 직업관을 소개하는 자리가 아니라고. 이런 멋있어 보이는 거 말고,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없니? 좀 더 날 것 그대로의 너에 대해서 말해보라고. 지금 너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뭐야. 요즘 가장 자주 간 곳? 요즘 가장 많이 한 행동?


“음음. 나는 책 읽는 걸 좋아해. 지금 미국에 있는데 제일 좋아하는 곳은 도서관이야. 오늘 아침에도 다녀왔어. 처음 낯선 땅에 왔을 때 외롭고 어색했는데, 처음으로 마음이 편해졌던 곳이 도서관이었어. 가장 좋아하는 일도 책을 읽는 거야.”


책? 그래, 좋아하긴 하지. 근데 너 요즘 틈날 때마다 소파에 드러누워서 쇼츠를 더 많이 보지 않아? 한국 음식 그립다고 먹방 자주 보던데.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리긴 하지만, 솔직히 너 그거 다 읽어? 그냥 책에 둘러싸여 있는 거, 책을 들고 다니는 게 좋은 거 아니야? 너 지금 약간 소개팅 나온 사람 같아.


“안녕. 내 이름은 장은교야. 음, 나는 책을 좋아하는데, 이곳에선 전부 영어로 읽어야 해서 좀 답답해. 한국 음식이 자주 생각나서 먹방을 보긴 하지만 그래도 책을 더 좋아해. 말하다 보니까 갑자기 불닭볶음면 먹고 싶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음…다른 얘기부터 해볼까. 나는 프리랜서야.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해. 특히 내가 쓴 글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정말 기쁜데…”

언제까지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있을까? 아이는 커 가고, 삶의 무게는 늘어나고. 프리랜서의 삶이란 결코 쉽지 않구나, 슬슬 느끼고 있잖아? 너의 글이 누군가를 돕는다… 그런 그럴듯한 얘기 말고, 지금 너의 마음 바닥에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냐고. 너의 글이 돈이 될까, 너의 글을 언제까지 사람들이 좋아해줄까, 그런 걱정은 없어? 니가 진짜로 궁금한 건 뭐냐고. 니가 AI와 함께 찾고 싶은 답은 무엇이냐고.


으아아악. 면접장과 소개팅 자리는 뛰쳐나올 수 없지만, 채팅창은 X 버튼으로 간단히 탈출할 수 있다. 인내심 깊은 AI는 내가 삭제 버튼을 누르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서 묵묵히 기다려줄 것이다. 눈을 감았다. 어쩌다, 이렇게 심각해졌지?


솔직해지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씁니다.” — 드라마 〈안나〉 (각본·연출 이주영, 원작 정한아)

 

몇 년 전 본 드라마의 대사가 떠올랐다. 내가 일기장에 거짓말을 쓴 적이 있었나? 초등학교 때 선생님에게 제출할 숙제용 일기를 쓸 때, 중학교 때 엄마가 내 일기장을 볼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을 때. 나는 나를 꾸몄던 것 같다. 숙제와 시험에 대한 불평, 미운 친구에 대한 험담, 집안 사정상 눈치 보다가 포기해야 했던 어떤 것들은 일기장에 기록되지 않았다. 아무도 내 일기장의 존재에 관심을 갖지 않는 지금, 나의 일기는 솔직한가?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쓰는 사람들의 사정은 제각각이겠지만, 그중 일부는 나와 같을 것이다. 솔직한 마음을 제대로 꺼내본 적이 없어서. 사회적 기준과 의무, 남들의 이목을 신경 쓰며 살다가 진짜 내 마음이 뭔지 진지하게 따져본 적이 없어서. 나는 나를 속일 생각이 없지만, 그런 척을 오래 하다 보면 나조차도 그렇게 믿게 된다.

 

나는, 진짜 나를 알고 있을까?

나는, 지금의 나를 정확히 소개할 수 있을까?

아무 제한 없이, 눈치 볼 필요 없이 나를 소개할 기회에 나는 솔직한 나를 꺼낼 수 있는 사람일까?

 

세상에… 젠장, 솔직해지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것이었다.

 

SNS를 보면 어지러워질 때가 있다. 세상에는 ‘좋아요’와 ‘하트’, 축복과 응원의 메시지가 넘쳐나는 만큼이나 저주와 분노, 혐오의 말들도 가득하다. 과연 어느 쪽이 진짜 세상의 모습일까. 실명의 관계에선 천사의 언어를 쓰라고 강요받던 사람들이, 익명의 관계에선 참았던 어둠을 폭발시키는 것일까. 어느 쪽이 좀 더 사람들의 솔직한 진짜 모습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둘 다일지도, 아니면 모두 과장된 허상일까.

 

나는 종종 내가 가식적이라고 느낀다. 사실 저 사람이 못마땅한데 좋은 척을 한다. 사실 이게 하기 싫은데, 이게 하기 싫어서라기보다 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처럼 둘러댄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런 말은 무례해서. 아니, 속마음을 다 꺼내기가 불편해서. 비겁해서. 아니 사실은 내 진짜 속마음이 뭔지 나도 잘은 몰라서. 그렇다… 나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언제나.

 

다시, 예상보다 복잡해진 AI와의 첫 만남으로 돌아가보자. 잘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그저 나의 쓸모를 위해 필요한 만큼 내어보이면 되는 이 편리하고 간단한 관계에서조차 나는 왜인지 눈치를 봤다.

눈치를…

좀 보면 어때? (??) AI에게 잘 보이고 싶은가 보지. 이 관계의 설정을 잘 해보고 싶은가 보지. 나조차 아직 다 소화시키지 못한 거북한 단점과 고민들을 와르르르르르르 쏟아내어놓고, 자 이제 니가 좀 해결해봐. 이게 정말 솔직한 건가? 이것이 편리한 것인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본다.

 

친구에게 차마 못한 말을 상상해본다. “나는 니가 망고빙수를 먹으려고 한 시간 동안 줄을 서는 게 이해가 안 돼. 다음부터 나는 안 갈래. 나는 디저트에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게…”라고 쓰다가 멈칫한다. 정말 맛있는 떡볶이집을 발견했다고 생각해보자. 전국의 떡볶이 낭인들은 물론, 떡볶이가 무슨 음식이냐고 무시하던 사람들까지도 기립박수를 쳤다던 그 떡볶이집이 마침내 이 동네에 문을 열었다. 나는 한 시간 동안 줄을 설 수 있는 인간인가. 아무렴 그렇고 말고. ‘나는 떡볶이에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게…’ 좋은 인간이니까. 갑자기 망고빙수에 미친 친구가 이해가 된다. 역시 친구에게 괜한 쓴소리를 하지 않기를 잘했다. 사람은 변한다. 생각은 달라진다. 나의 마음은 얄팍하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와 다를 수 있다.

 

AI의 채팅창으로 돌아갔다.


“안녕. 나는 장은교야.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어. 나는 책 보는 걸 좋아해. 사실 빌리거나 사놓고 읽지 않은 책도 많아. <파우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처럼 어려운 책은 별로 안 좋아해서, 그런 유명한 책 얘기가 나오면 좀 찔려. 그래도 책이 참 좋아. 책 냄새를 맡는 거, 근사한 책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최근엔 책보다 먹방 쇼츠를 좀 더 많이 본 것 같긴 해. 한국 음식이 정말 그립거든. 미국 오기 전엔 불닭볶음면을 한 번 먹어보고 ‘이렇게 자극적인 걸 누가 먹지?’ 했었어. 근데 미국에 와서 혼자 한 박스를 먹었지 뭐야. 이유는 모르겠어. 한국이 그리운 걸까? 글쎄. 그런지도. 미국에 사는 게 힘들어? 글쎄,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


자, ‘이건 기억해줘.’ 내 마음은 자꾸자꾸 변해. 어제의 나를 빛나게 했던 것들이 오늘의 나를 초라하게 할 때도 있어. 어제 했던 결심이 오늘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작아질 때도 있고. 내가 너의 도움을 받아 야심차게 계획한 30일 프로젝트의 채팅창이 3일쯤 후부턴 조용해질 수도 있어. 그래도 그런 나를 너무 한심해하지 말고, 지켜봐줘. 나는 여전히 나를 알아가는 중이거든. 무엇이 좋다, 싫다. 나는 그걸 판단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해. 좋아요 버튼도 싫어요 버튼도 1초 안에 누르지 못하는 사람, 그게 나야.


때때로 엉망진창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이제부터 포기하지 않고 해나가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건 ‘나 자신’이야. 그것이 내 취향이든 고민이든, 나의 과거이든 미래든. 지금부터 하나씩, 시간을 들여서 나에 대해 알아가보고 싶어. 내가 나에게 너무 섣부르지 않도록. 너무 쉽게 나를 판단해버리거나 몰아붙이지 않도록. 무엇보다 포기하지 않도록. 공을 들여, 마음을 쌓아가며 나와 조금 더 친해지도록 너도 도와줘. 오늘의 자기소개는 여기까지야. 우리, 자주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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