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할 만큼, 평탄하게만 살아온 것 같은 사람. 하지만 그의 삶에도 숱한 변곡점은 존재했습니다. 라디오 PD 김혜민 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는 이야기를 줄기차게 전하는 이유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은 겪지 않은 것 자체가 자신이 사회에 진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김혜민 님이 찾은
마음 성장의 세 가지 단서
•누군가를 보내는 과정은 시간이 걸리고, 노력도 필요한 일이에요. 의사자 임세원 교수님의 아들 임정섭 군과 아버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애도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어요.
• 어려움을 이겨내는 법은 없어요. 그냥 버티는 거죠. 아버지의 병환으로 힘들었던 때 쓰기 시작한 ‘고난 일지’는 나중에는 ‘축복 일지’로 이름을 바꿨어요. 이 시간은 결국 지나갈 거고, 나를 성장시킬 거라고 믿었거든요.
• PD가 되어 성공한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보니 마냥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요. 성공한 사람보다 매일의 일상을 잘 살아가는 ‘좋은 생활인’이 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게 제가 사회에 진 빚이라는 걸 알았죠.”
자살 예방 콘텐츠에 관심이 많아요
‘소리로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저를 소개해요. 라디오 PD로 일하고 있고, <지금보다 괜찮은 어른>, <눈 떠보니 50>이라는 책을 낸 작가이기도 합니다. 2018년도에 <검색할 수 없는 두 글자>라는 자살 예방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이후에도 자살 예방 콘텐츠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어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어요
어느 날 문득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제 성격이 좋아서인 줄 알았는데, 철이 들고 돌아보니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을 겪어본 적이 없더라고요. 물론 개인적으로 힘든 일은 있었어요. 아버지가 쓰러지신 적도 있고, 취업 때문에 고생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사회적으로 혐오와 차별을 받은 경험은 없었죠. 제가 사회에 진 빚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생각을 계기로 정신 건강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자살의 큰 원인 중 하나가 사회적인 구조에요. 그 구조를 제가 바로 바꿀 수는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방송’을 만들어 보자고 마음먹었어요. 그렇게 정신 건강, 마음방역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2018년 <검색할 수 없는 두 글자>라는 자살 예방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어요.
“임세원 교수님이 떠난 뒤
사람의 마음을 보살피는 분들마저
너무 큰 상처를 입는 것을 목격했죠.”
고 임세원 교수님의 삶과 죽음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기획했어요
고 임세원 교수님은 <보고 듣고 말하기>라는 우리나라의 표준자살예방교육을 만든 분이에요. 살아생전 뵌 적은 없지만, 마음방역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 분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는 알고 있었죠. 2018년, 임세원 교수님이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어요. 사람의 마음을 보살피는 정신과 선생님들, 사회복지사분들이 너무 큰 상처를 입는 것을 목격했고, 이분들을 위로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추모 콘서트를 기획했어요. 2022년에는 임세원 교수님의 삶과 죽음을 담은 <의사자 임세원 추모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요.
고 임세원 교수님의 아들과 함께 다큐를 제작했어요
임세원 교수님의 아들인 임정섭 군과 대화를 나누며 대학교에서 언론을 전공 중이라는 걸 알았어요. 마음을 만지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고, 결국 다큐멘터리 제작을 함께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본인이 생애 처음 만드는 작품의 주인공이 아버지라면 의미가 클 것 같았거든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생긴 트라우마,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우리는 애도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누군가를 보내는 과정은 너무 소중하고,
또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필요한 일이에요”
교수님의 마지막 영상, 그 20초가 너무 길게 느껴졌어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중 임정섭 군이 사건 당시 CCTV를 확인하자고 제안했어요. 아버지의 마지막 장면을 봐야 아버지를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근무했던 병원으로 찾아가 진료실에서 CCTV를 함께 확인했어요. 많이 긴장하는 모습이 보여서 ‘안 봐도 돼. 네가 마음의 준비가 되면 보자.’라고 했지만 결국 끝까지 보기를 선택했어요. 20초 남짓의 영상이었는데, 그 20초가 너무 길게 느껴졌어요. 근처에서 아버지의 친구분들이 기다리고 계셨어요. 와서 함께 그 친구를 안아주고, 함께 술 한잔을 하던 모습이 기억나요. 임정섭 군이 무언가 큰 산을 넘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 다큐멘터리가 아들에게 애도의 시간이 됐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임세원 교수가 꿈꿨던 세상이 무엇인지 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다큐멘터리를 시작했어요. 아들이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게 되면서 애도의 중요성을 느꼈고, 누군가를 보내는 과정이 너무 소중하고,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 또한 전달하려 노력했어요. 임정섭 군이 ‘이 다큐를 만들기 전에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나고 눈물이 나왔는데, 아버지의 삶과 죽음을 통과하고 나니 아버지와 함께한 좋은 기억이 떠올라요.’라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사실 우리 모두 사랑하는 사람이 갑작스럽게 떠난다면 어떻게 애도하는지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애도의 중요성, 문제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어요.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어려운 시간도 내 인생을 구성하는 하나의 블록일 뿐이에요.”
해결책보다는 공감이 먼저예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어쭙잖은 위로와 조언은 오히려 큰 폭력 같아요. 모든 생명체는 살고자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어요. 본능을 거스르는 행동을 생각하기까지 그 사람이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겠어요. 해결책보다는 공감이 먼저예요. ‘진짜 힘들었겠다. 너니까 지금 버틴 거야.’ 말해주는 게 우선이고, 그다음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제도는 생각보다 많아요.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는 점,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해요.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없어요. 그냥 버티는 거죠
취업을 준비할 때까지는 인생에 어려움이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취업을 위해 면접을 보는 마지막 날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졌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입사에는 성공했지만, 굉장히 어렵고 힘든 시간이었죠. 그 때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고난 일지’라는 제목이었지만 나중에 ‘축복 일지’라고 이름을 바꿨어요. 이 시간은 분명히 지나갈 거고, 결국 저를 성장시킬 거라고 믿었거든요. 그렇게 저 자신을 위로한 거죠.
경험과 감정들은 내 인생을 쌓아가는 블록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어려운 시간도 하나의 블록일 뿐이에요.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없어요. 그냥 버텨내는 거죠. 다만, 그 버티는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남들과 비교하는 순간 지옥문이 열리고,
내가 가진 일상의 행복이 깨져요.”
성공한 사람보다는 ‘좋은 생활인’이 되자
어린 시절부터 ‘최고가 돼야 한다.’ 이야기를 듣고 자랐는데, 막상 PD가 되어서 성공한 사람들을 보니 마냥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어요. 저 일을 하려고 정말 나보다 수천 배, 수만 배 노력한 사람인데 왜 나보다 행복하지 않을까를 생각했어요. 중요한 건 남이 정해주는 기준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행복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남들과 비교하는 순간 지옥문이 열리더라고요. 비교하는 순간 내가 가진 일상의 행복이 깨져요. 비교하는 대신 내가 잘할 수 있는 종목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열심히 뛰는 게 중요해요.
그래서 ‘일상을 잘 살아가는 ‘좋은 생활인’이 되자’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어요.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일생 매 순간 신나는 일만 있진 않잖아요. 내 일상을 돌아볼 수 있고, 남을 돌아볼 수 있고,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을 잘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좋은 생활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뛰다가 힘들면 주변과 제도의 도움을 받아야죠. 당신을 평가하고 비난하는 사람보다
공감하고 도움을 줄 사람이 훨씬 많다는 걸 믿어보세요.”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너희 탓이 아니야’
예전에는 강의에 가서 ‘열심히 하면 라디오 PD 될 수 있어요.’라고 얘기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사람을 뽑지 않으니까요. 20대는 나를 찾고 세상을 알아가는 시간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 청년들에게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너희 탓이 아니야’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물론 자기 인생의 마라톤을 뛰는 선수로서 최선을 다해 뛰어야 해요. 하지만 뛰다가 힘들면 주변 사람들과 제도의 도움을 받아야 해요. 이야기를 듣고 나를 판단하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세상에는 함께 공감해 주고 도움의 손길을 줄 사람이 훨씬 많다는 걸 믿었으면 좋겠어요. 도움을 요청하는 일을 포기하지 마세요.
아무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세상을 꿈꿔요
누군가 저보고 ‘당신이 만들고 싶은 세상이 뭔가요?’ 물어본다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라고 말할 거예요. 생명은 살고 싶은 게 본능이잖아요. 본능을 거스르는 결심을 할 정도로 인생이 힘들다는 건 개인의 잘못이 아닌, 사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뒤집어 생각해 보면, 우리가 노력하면 막을 수 있다는 것 아닐까요.
김혜민 님의 ‘내 마음을 성장시켜 준 것들’
• 축복 일지
‘축복 일지’를 썼던 시기가 제 삶의 변곡점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읽어보면서 돌아보면 별 일 아니었던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해요. 시간의 마법이죠.
•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직업 선택, 결혼과 같이 중요한 순간에는 외부 요인은 신경 쓰지 않고, 항상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서 주체적으로 선택했어요.
• 책
유일한 취미가 독서예요. 수많은 책을 통해 인생의 길을 찾았고, 많은 것을 배웠어요. PD 활동을 할 때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