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미할 수 있는 진실되고 멋진 칭찬
오래 전에 나는 ‘칭찬을 퍼부으며 다가오는 사람을 믿지 말라’고 쓴 적이 있다. 의심이 많고 부정적이며 자기 확신이 없는 나는 근거 없는 칭찬을 폭격기처럼 쏟아부으며 접근하는 이들 앞에서 쉽게 불안하거나 불편해지곤 한다. 이를테면 어릴 때는 키가 크다는 이유로 “어머, 미스코리아네! 미스코리아야!” 라고 소리치던 아주머니 때문에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당황했고(키가 크다고 다 미스코리아 되는 건 아니다), “모델처럼 멋져요!”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으며(키가 크다고 다 모델이 되는 건 아니다), 내가 쓴 글을 읽은 편집자가 “정말 좋아요 ㅜㅜ”라고 말해도 속으로 ‘흥, 일단 추켜세워주고 나중에 딴 소리 할 게 뻔해’ 하고 상처받을 마음의 준비를 했다. 피곤한 인생이다.
그렇다고 내가 칭찬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세상에 칭찬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칭찬을 듣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가급적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닌 진실된 칭찬만을 듣고 싶다. 나 스스로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앞에서야 부끄러운 척 손사레를 치겠지만), 그리고 잘 숙성된 와인처럼 오랫동안 곱씹으며 음미할 수 있는 멋진 칭찬을 듣고 싶다. 그런데 진실되고 멋진 칭찬이란 뭘까?
내 기억 속에는 칭찬의 순간보다는 수치의 순간이 더 많이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남들 보지 않을 때 슬쩍 주워서 주머니 속에 넣었다가 빨고 다려 영원의 노트에 붙여둔 칭찬의 말들이 있다. 수십 년 전에 들은 한 마디조차 내게는 여전히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았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칭찬은 이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2001년, 당시 연극영화과 4학년 학생이던 나는 미루고 미루던 전공필수 ‘연극연출론’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이 수업은 과히 H 대학교 연극영화과 졸업의 3대 난관에 들 정도로 악명 높았다. 대한민국 연극계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교수님의 학점에는 자비란 없었고, 학기말 시험에서는 모든 학생이 각자 연극의 한 씬을 연출해 무대에 올려야만 했다.
영화를 전공하며 연극을 싫어하던 나는 한겨울에 몇 주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학교에서 밤을 새워가며 겨우 <햄릿>의 한 씬을 연출했다. 연극이 싫었기 때문에 내 멋대로 만들었다. 배우들은 관객들 가운데에서 연기했고, 소품인 왕관과 장미와 칼은 공연 도중 배우가 철사 하나를 구부려가며 즉석에서 만들었으며, 의상은 흰 드레스 위에 커다란 남성용 재킷을 입히는 식, 무대장치는 만들기 귀찮아 패스하고 촛불들로 대신했고, 음악은 심지어 가야금 장인 황병기의 ‘미궁’이었다. 연극을 만드는 과정 하나하나가 쉽지 않았고, 배우로 세운 친구들은 내 연극의 컨셉을 이해하지 못했다. 수면부족과 스트레스로 인한 방광염에 시달려가며 나는 이런 짓을 시킨 교수님을 증오하고 또 증오했다. 내 평생 연극이라면 다시 쳐다도 안 보리라.
그 날 나의 엉망진창 <햄릿>이 끝났을 때, 교수님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특유의 시니컬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한수희 씨는 영화 대신 연극을 한 번 해보시지요.” 그 영광스러운 칭찬의 말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30여 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토씨 하나 잊어버리지 않은 걸 보라.) 학교 정문에 현수막이라도 만들어 걸고 싶을 정도로 나는 그 칭찬이 자랑스러웠다.
대학 4년 내내 나는 재능도 없고 매력도 없으며 어디 갖다 쓸 구석이 없는 인간이라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학점은 그야말로 엉망진창, 수업에도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았고 시험 공부조차 하지 않았다. 그 귀한 시간을 그야말로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헛소리하는 데 다 썼다. 그때 내 마음은 한없이 한없이 어둡고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러니 그 칭찬의 말이 내게 얼마나 귀했겠는가. 나는 그런 칭찬의 말들 몇 개를 상장이나 메달처럼 품고 대학을 졸업했다. 그것만으로도 대학 생활이 의미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건 정말 진실되고 멋진 칭찬이었다.(고 믿고 싶다.)
그러고 보니 옛날 이야기가 하나 더 생각난다. 자꾸 옛날 이야기만 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옛날 이야기란 건 곶감처럼 먹어도 먹어도 맛이 있는 것이므로 그냥 해보겠다. 대학에 다닐 때, 학교에서 가장 많이 듣던 단어는 ‘쓰레기’였다. 선배도 동기도 후배도 다들 ‘쓰레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인 우리는 세상 모든 영화와 시나리오를 거침없이 ‘쓰레기’라 불렀다. ‘쓰레기’가 아닌 것들은 풀밭 위의 네잎 클로버만큼이나 적었다. 학생 영화는 특히나 ‘쓰레기’들의 집합소라 할 만했다. ‘쓰레기’를 ‘쓰레기’라 부르는 것은 학식과 소양이 넘치는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때의 우리는 마치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의 밉상 캐릭터 황동만까지는 아니어도, 모여서 남들 뒷담화, 특히 황동만 뒷담화 말고는 하는 게 없는 그의 친구들 같았다. ‘쓰레기’를 ‘쓰레기’라 부를 때 우리에게는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난 뒤 우리의 마음은 음침한 기쁨과 동지애로 넘쳤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은 ‘쓰레기’가 아니었고,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뭐라도 된 것 같은 그 순간을 만끽했다.
헐뜯기는 간단하고 칭찬하기는 어렵다
일본의 작가 우치다 타츠루는 험담과 칭찬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 듯한데 헐뜯기는 간단하고 칭찬하기는 어렵다.
(중략)
험담할 때는 대상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필요치 않다.
하지만 칭찬할 때는 대상에 대한 적절한 이해(라고 적어도 필자에게 인정받는 것)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잘 이해되지 않지만)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쨌거나 칭찬하는’ 자세를 취한다. 내 경험상 ‘잘 몰라도 칭찬함’으로써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확실히 깊어지기 때문이다.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
그렇다. 헐뜯기는 간단하고 칭찬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쉬운 길로만 갔다. 헐뜯는 건 대충 봐도 할 수 있었다. 사실 안 보고도 가능했다. 아는 것도 없고 예의도 없고 개념도 없었으므로 우리는 그냥 물고 씹고 뜯는 일만 했다. 그러나 칭찬을 하려면 대상을 더 신중하게, 촘촘히, 제대로 봐야 했다. 그 대상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까지 가늠해야 했다.
반대로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대상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상과 특별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건 우리 자신에게도 이득이 될 일이었을 것이다. 그 귀한 시기에 나와 세상을 접점을 그런 식으로 늘려 나갔다면 우리의 미래는 좀 더 밝았을 것이다. 나와 세상의 접점이 많을수록 인생은 풍요로워지므로.
그때의 우리는 주변의 모든 것들에 좀 더 다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걸 배운 적이 없었다. 우리는 그럴 줄을 몰랐다. 20대 초반에게 다정함이라니, 낯 간지럽게.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의 영화사 PD 변은아는 모두가 무시하는 황동만의 좋은 점을 알아보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가 동만에게 던지는 칭찬은 무척 특별하다. “감독님은 천 개의 문이 다 열려 있는 사람 같아요.” 천 개의 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일까? “자기 속에 천 개의 문이 있다면, 아직 한 개의 문도 제대로 열어보지 못한 인간이 쓴 글을 보면 지겨워서 숨 넘어가요. 가끔 몇 개의 문이 열려 있는 글을 만나면 눈이 번쩍 뜨이고. 감독님은 천 개의 문이 활짝 다 열려 있는 사람 같아요.” 상대를 깊고 신중하게 들여다본 이만이 건넬 수 있는 진실되고 멋진 칭찬의 말이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은 나조차도 모르는 나의 장점을 누군가가 콕 짚어내 칭찬해 준다면 어떤 기분일까? 어떤 기분이긴,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기분이 들겠지.
칭찬은 하는 이에게도 선물 같은 것
어떤 텍스트건 칭찬만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칭찬할 수밖에 없는 텍스트에 대해서만 쓰고 싶다는 뜻이다. 나는 그런 글을 쓰고 나면 내 삶이 조금 더 가치 있어졌다고 느끼는 부류의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도대체가 시간이 너무 없다. 그 얼마 없는 시간을, 내 삶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일에 나는 써야 한다.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쓴 것처럼 이제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더 이상 이 아까운 시간을, 이 황금 같은 시간을 고작 남을 깎아내리는 데 써서는 안 된다. 물론 칭찬에는 용기도 필요하고 수고도 든다. 칭찬한다고 돈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칭찬은 받는 이뿐 아니라, 하는 이에게도 선물을 준다.
애써 칭찬할 꺼리를 찾아내려다 보면 두뇌 회전이 될 테고(치매 예방!), 굳이 좋은 점을 찾느라 긍정 회로를 돌리다 보면 몸 안이 긍정적인 효과를 내는 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 같은 것들로 가득 찰 것이다.(아마도…) 그러면 소화도 잘 되고 배설도 잘 될 것이며, 지방은 알아서 불타고 혈압은 낮아지고 뱃살은 들어가겠지. 그러면 나는 건강해지고 인상도, 피부도, 몸매도 좋아져서 사람들의 호감도 사게 될 테고, 더불어 칭찬을 잘하는 나의 인망도 높아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또 가끔씩 이런 칭찬의 말도 들을 수 있겠지.
“어머,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세요!”
칭찬은 좋은 것이다. 그러니 올해부터는 칭찬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자. 우선 나부터. 이렇게 긴 글 읽기 싫어하는 시대에 여기까지 읽은 당신의 인내심과 문해력과 식견과 취향, 역시 보통 이상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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