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가족을 생각하면 어떠신가요? 마냥 편안하고 따뜻하고 든든하기만 한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가족은 우리에게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일상과 대인관계에도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고맙지만 짜증 나고, 의지하지만 부담스럽고, 미운데 누구보다 사랑하는 이중감정을 가장 많이 불러일으키는 관계가 바로 가족이지요.
청년의 시기는 부모와 정서적, 경계적, 물리적 독립을 시작하는 시기이고 그것은 성인 초기의 발달상 본능입니다. 그 본능을 따라서 우리는 이전과 다르게 부모님을 대하게 됩니다. 청소년기만 해도 나의 생각이 없이 그저 따르기만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원래는 청소년기부터 반항을 시작하는 게 건강한 발달인데 우리나라는 대부분 청소년기까지도 굉장히 순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요.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전공도 부모님 말씀대로 선택하고 어떤 아르바이트를 하는지도 부모에게 허락을 받는 편이고요.
저도 그랬답니다. 그러다가 20대 초반 어느 날 웨이브 파마를 하고 집에 갔는데 엄마가 “너는 엄마한테 말도 안 하고 머리를 했어?”라고 묻더군요. ‘내가 내 머리를 내 돈 주고 바꾸는데 엄마의 승인이 필요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처음 들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20대 극초반이면 아직도 자아가 깨어나지 못할 수 있을 때예요. 전두엽의 발달상 25세까지는 청소년기라고 볼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부모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마음과 거역하고 싶다는 생각, 부모님 결정이 옳다는 생각과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충돌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20대 후반쯤 되면 이전보다 더 많이 부모님과 싸우기 시작해요. 부모님은 당황합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딸과 아들은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사람들처럼 굽니다. 자녀는 도대체 왜 나를 구속하는지, 왜 나의 독립성을 인정해 주지 않는지 답답하기만 하죠. 그렇게 부모와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몇 개월, 길면 몇 년을 살게 되면서 ‘도저히 이 집에서 못 살겠다. 나가야겠어, 아무것도 지원받지 않을 거고 간섭받지 않을 거야’하고 독립을 시작합니다. 그건 나쁜 게 아니라 엄청 정상적인 발달입니다.

“물리적인 독립만이 전부가 아니에요.”
아직 정서적 독립이 남았거든요. 물리적, 경제적 독립은 비교적 빠르게 이룰 수 있어도 정서적 독립은 중년 이상이 되기까지 혹은 죽을 때까지 못 하는 사람도 아주 많습니다. 정서적 독립을 못 했다는 증거는, 떨어져 살아도 여전히 부모와 많이 다투고, 부모의 말에 많은 감정적인, 또 실제적인 영향을 받고, 죄책감이나 의무감이나 동정심도 강합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부모님이 너무 답답해서 머리끝까지 화가 나요. 여전히 그들의 공감 없는 태도, 무관심하거나 통제적인 태도에 상처를 받습니다. 미운 것도 독립이 안 돼서 그렇거든요. 거기서 조금 더 가면 부모를 놓게 됩니다. 더 멀리하게 됩니다. 그것도 역시 정상적인 발달, 정서적 독립 과정입니다.
저는 슈퍼우먼인 엄마의 수용과 인정을 받고 싶었어요. 제가 그런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지나 보니 저는 엄마를 너무 좋아했고 너무 어려워했더라고요. 엄마가 하는 말은 다 맞고, 엄마가 하는 일은 다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이상하게 저 자신은 강한 수치심과 불안감, 일중독이나 완벽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죠.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굉장히 애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상담사가 저에게 말해주더군요. “엄마를 실망시킬 수 없나요? 하지만 실망하는 것은 엄마의 선택이에요. 엄마는 실망할 수 있는 힘이 있는 분이에요. 그 힘을 믿어주시면 안 될까요?” 저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어요. 당연히 엄마를 실망시키면 안 되고 슬프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사실은 엄마는 저에게 실망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요.
진짜 부모를 위한다는 것은 그들이 나를 떼어내고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자녀가 먼저 떨어져주는 것이에요. 그 과정은 아름답지가 않아요. 서로 마음이 상합니다. 아름다운 이별 같은 건 없어요. 아름답기만 하면 놓아줄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서로 놓고 나면 매우 아릅답습니다. 바이는 있지만 굿바이는 없어요. 하지만 다 지나고 보면 굿바이가 되는 거예요.

“부모에게는 실망할 수 있는 선택권과 힘이 있어요”
제가 변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한순간이 있었어요.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엄마가 자기주장을 열심히 펼칠 때, 제가 그 반대 의견을 냈어요. 엄마는 역시나 지지 않고 계속 자신의 주장이 맞다며 이야기를 했지만 제가 평소와 다르게 끝까지 그 말에 반박하면서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고 말했죠. 그 순간 엄마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적막이 흐르며 대화가 멈췄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를 이겨본 느낌도 들고 엄마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닌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성인으로서 우뚝 서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전 같으면 죄책감에 후회하며 엄마 눈치를 봤을 텐데 이제는 엄마가 실망할 수 있는 선택권과 힘이 있다고 믿으니 마음이 무겁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스스로 자녀를 독립시켜 주지 못할 수 있어요. 어쩌면 그건 자녀의 몫입니다. 자녀가 스스로 나와야 해요. 부모에게 자녀는 자기의 피와 살이라서, 자립시켜야 한다는 지식은 있어도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습니다. 본인은 자립시키고 있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죠. 물리적, 경계적인 독립은 부모가 시켜줄 수 있어도 정서적 독립은 부모가 못 해줍니다. 스스로 살점을 떼어내는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래서 그 살점이 알아서 떨어져 나가주면 되는 겁니다. 물론 아프죠. 피도 나고 흉터도 질 수 있어요. 하지만 떨어져나와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인격체가 되어야 서로 병들지 않을 수 있어요. 그게 진짜 효도이고 존중입니다.

“융합과 친밀은 달라요.”
많은 분이 융합을 깊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융합은 엉킨 머리카락과 같아요. 엉켜서 빗질을 해도 내려가지지 않는 경계선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친밀은 가지런한 머리카락과 같아요. 서로 가깝지만 엉겨 붙지 않은 상태, 너와 나의 구분이 명확한 상태, 부드럽게 빗질이 되는 머리카락처럼 서로 간의 만남과 소통이 부드러워집니다. 일상을 나누고 의견을 나누지만 서로 큰 영향을 주고받지 않고 각자의 생각과 방식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내 부모는 못해도 나는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영향받지 않으면 부모는 달라지지 않아도 이미 관계는 예전 같지 않은 것이죠. 내가 부모에게서 나오는 것이 부모를 존중하는 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어요. 부모는 서운해하겠지만 그것도 부모의 몫입니다. 마지막 양육인 셈이죠. 그 마지막 양육을 몇 살에 마치게 할까요? 빠를수록 좋겠죠. 너무 심하게 엉켜있다면 잠시 몇 개월, 혹은 몇 년이라도 연락을 폭삭 줄이고 멀리 떠나있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 후 다시 만나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 거예요. 여러분의 인생을 사세요. 그것이 곧 부모에게 부모 인생을 돌려주는 길입니다.
저는 과거에 친정집이 세상에서 제일 불편한 곳이었는데 이제는 가도 좋고 안 가도 그만인 자유로운 곳이 되었어요. 이게 독립인 것 같아요. 이중감정은 정말 괴로워요. 한 대상을 향한 두 가지의 마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죠. 죄책감을 내려놓고 서로를 위한 관계 개선을 시작해보세요. 과정은 힘들지만 독립이 되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편안하게 부모님을 대할 수 있을 거예요.
글. 웃따(상담심리사)
18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채널 ‘상담심리사 웃따’를 운영 중인 상담심리사이자 작가. 채널 이름처럼 구독자들에게 ‘웃긴데 따듯한 심리한 솔루션’을 전하고 있다. 상담하면서 쌓은 지식과 오랫동안 자신의 상처를 보듬으며 깨달은 인생의 지혜를 심리 에세이 <인생을 숙제처럼 살지 않기로 했다>에 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