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늦게까지 여러 일을 하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 뭐라도 챙겨 먹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사실 먹는 것도 어느새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뭔가 배 속에 넣어야 오늘 하루를 또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이럴 때는 식빵만 한 게 없지요. 냉동실 한구석에 딱 한 장 남아 있던 식빵을 꺼내 토스터에 넣었습니다. 냉동 상태라는 점을 감안해 과감히 최고 온도로 올려놓고, 다른 일을 하고 있었죠. 땡! 하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향이 퍼졌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식빵이 아니라 석탄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식빵도 없는데, 이걸 어쩌면 좋을까요?
계획대로 그냥 먹자니 타버린 식빵처럼 위장도 까맣게 될 것 같고, 안 먹자니 기운이 없고 배는 고팠어요. 지금 생각하면 차라리 시간을 들여 중간 온도로 천천히 구웠어야 했습니다. ‘Toast-out’. 말 그대로 바싹 타버려서 먹을 수 없는 상태. ‘burn-out’의 식빵 버전이지요. 속은 텅 비고 까맣게 타버린 상태. 바로 저였습니다.
우리는 늘 열정을 ‘불태워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도 있지요. 그러나 요즘 청년들은 굳이 사지 않아도 충분히 고단한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이제 막 말을 배우고 글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그렇게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남들은 이미 한참 앞서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가만히 서 있으면 나만 뒤처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그렇게 열정의 온도를 계속 올리다 보면, 어느새 내 안의 식빵이 타버린 줄도 모르고 처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무기력과 번아웃같은 증상은 때로는 나를 살려요.”
제가 유튜브를 처음 시작할 때 상담심리학이라는 주제를 영상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말하는 것도 좋아하고 강의하는 것도 좋아하니까 지치는 줄 몰랐어요. 게다가 힘을 얻는다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반응이 좋으니 재미에 보람까지 더해져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나 둘, 일이 많아졌습니다. 강연, 상담, 영상 편집, 책 집필, 게다가 저는 목사이기에 교회 일까지 많았어요. 이 모든 것을 해내기 위해 쉬는 시간을 없앴고, 가족들과 여행 한 번 즐길 틈도 없이 달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데도 엄청난 결심이 필요했죠. 마음은 텅 비고, 몸은 무겁고,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즐겁다고 여겼던 상담하는 일, 강의하는 일 모두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고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번아웃’이었습니다. 저는 몸이 망가졌고 허리디스크 염증으로 수술을 하고 입원을 반복했습니다. 몸이 아프면서 그동안 제가 달려온 모든 시간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사는 건 나를 존중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나조차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이 누구를 존중해줄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무기력과 번아웃같은 증상은 때로는 나를 살려요. 엔진 과열인 자동차에 잠시 브레이크를 걸어 사고를 막아주거든요. 제가 그 때 번아웃이 없었다면 멈추지 못했을 거고, 그러면 제가 과연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이 직업들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좋아하는 일이라도 번아웃은 옵니다”
번아웃은 무기력함 그 자체입니다. 특별히 아픈 데도 없고, 일상이 무너진 것도 아닌데, ‘나만’ 무너져 있는 상태. 심리 상담에서 종종 마주치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제 내담자 중에도 그런 분이 계셨습니다. 오랜 공부 끝에 이제 막 강의 일을 시작하려던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고, 그저 눈물만 흘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고요. 그러던 중 친구가 제주도행 비행기 표를 보내주며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편한 신발만 신고 와.”
그렇게 그녀는 제주도에서 3개월간 걸었습니다. 걸으며 울고, 걸으며 생각하고, 걸으며 분노를 토해냈습니다. 발에 물집이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그녀는 다시 ‘무언가’가 마음속에 살아나는 느낌을 받았고, 지금은 훨씬 더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잠시 멈추고 바다를 걸었기에 제2막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 재미가 있고 적성에 맞아 번아웃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재미있는 일은 그만큼 그 일이 좋아서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번아웃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또 ‘그 일마저 나에게 맞지 않았던 것인가’, ‘과연 나는 어떤 일을 평생 지치지 않고 끈기 있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번아웃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열정을 쏟아 부은 증거입니다. 그만큼 열심히 살았고 진심을 다했다는 훈장입니다. 탈피를 준비하는 갑각류처럼, 제2막을 위한 껍질을 벗는 시기입니다. 탈피 중인 갑각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저 조용히,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단단한 껍질이 형성되니까요.
여러분이 겪는 번아웃은 바로 그 껍질을 갈아입는 시간입니다. 성충이 되는 만큼 감당해야 할 그릇의 크기와 책임이 더 커졌기 때문에, 그만큼 자신을 재정비하고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시간인 거죠. 그러니 그 시간이 찾아오면 억지로 뭘 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먹고 자고 숨 쉬고, 아주 기본적인 것들만 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래야 단단한 껍질이 제대로 자라납니다.

“번아웃은 고장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피트스톱입니다.”
자동차 경주에서 ‘피트스톱’이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최고속도로 달리던 자동차가 갑자기 멈춰 타이어를 갈고 연료를 채우는 시간입니다. 질주를 멈추는 게 아니라, 더 안전하게 잘 달리기 위한 전략적인 멈춤이지요. 그러니 우리도 삶이라는 긴 레이스에서 번아웃이 올 때, 그것을 ‘나만의 피트스톱’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요?
우리는 종종 ‘아직 부족하다’는 감정 속에 갇혀 살아갑니다. 열정이 식는 걸 두려워하고, 뒤처지는 걸 실패라고 여기죠. 하지만 사실, 우리가 무언가를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랑의 무게가 우리를 지치게도 합니다. 노력한 만큼 아프고, 애쓴 만큼 공허해지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오히려 그 과정은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를 증명해 주는 작은 상처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번아웃은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진심의 흔적입니다. 열정의 진정한 의미는 한 번에 활활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꺼졌다 다시 피어나는 반복을 의미하며 이 과정을 통해 비로소 긴 시간 타오르게 됩니다. 그러니 번아웃을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로 받아들여 주세요. 그 쉼표 하나가, 다음 문장을 더 아름답게 만드니까요.
피트스톱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다시 묻는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는 왜 이 길을 달리기 시작했지?’, ‘지금 달리고 있는 방향이 나에게 맞는가?’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라도 좋으니, 내 안에서 다시 ‘시작해도 괜찮아’라는 속삭임이 들려올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그러면 생각보다 빨리 번아웃 이후의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단단한 내가 되어 있을 거예요. 다시 타오를 수 있는 나, 그리고 더는 타지 않게 나를 보호할 줄 아는 나. 이제는 열정을 관리할 줄 아는 어른이 된 나. 그러니 지금, 혹시 당신의 식빵이 바싹 타버렸다면, 괜찮습니다. 그건 누군가의 실패가 아니라, 한 사람의 ‘성장기’일 뿐입니다. 불이 꺼진 듯한 그 자리에서, 조용히 다시 숨을 들이마셔 보세요. 당신은 다시, 잘 살아날 수 있습니다. 아주 멋지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