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정지혜의 책장] 나를 회복하게 해준 치유의 책들

커다란 불행 앞에서, 삶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저를 지탱해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정지혜 독립서점 '사적인 서점' 대표, 작가

2022년 여름, 처음 받은 건강검진에서 제자리암이 발견되었습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고작 한 계절을 통과하는 동안 저는 제자리암에서 3기말 암 환자가 되었고, 두 번의 수술과 아홉 번의 항암, 스물일곱 번의 방사선치료 끝에 2023년 여름, 간절히 바라던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요. 하루아침에 저의 세계를 깨뜨리고 뒤집고 흔들어 놓은 질병이라는 커다란 불행 앞에서, 삶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저를 지탱해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힘든 시간을 통과 중인 당신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1. 호지노 미치오, <긴 여행의 도중>

호시노 미치오는 알래스카의 유구한 자연 풍경을 담는 일에 일생을 바친 사진작가입니다. 도쿄의 헌책방에서 우연히 집어 든 알래스카 사진집이 그의 인생에 걸친 긴 여행의 시작이었지요. 촬영 중 닥친 불곰의 습격으로 43세에 이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호시노 미치오는 알래스카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고 그곳에서 만난 귀한 풍경들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했습니다. <긴 여행의 도중>은 그가 남긴 유고작이에요.

 

책을 읽다 보면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바다와 하늘이 경계 없이 하나가 된 풍경 속에서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는 혹등고래를 포착한 장면 같은 것. 일주일간의 짧은 휴가를 얻어 고래를 쫓는 여행에 동참한 친구는, 호시노 미치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에 오길 잘했어. 내가 도시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순간에도 알래스카의 바다에서는 고래가 바다 위로 솟구쳐 올라온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좋았어.” 저 역시 친구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일상에 쫓길 때에도 다른 곳에서는 또 하나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면, 아니 마음 한구석에서라도 상상할 수 있다면 살아가는 힘이 될 테니까요.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온몸이 망가져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서 지내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휴대폰 사진첩을 열어 지난 여행에서 수집한 아름다운 풍경들을 자주 꺼내 보았어요. 수천 개의 석회암 기둥이 모래 위로 불쑥 솟아 있는 피너클스 사막에서 수평선 너머로 온 세상이 물들어가던 여름날의 선셋. 물안개 사이로 낙엽 쌓인 숲길을 자박자박 걸었던 아른험의 아침과 밤바다를 수놓은 야경으로 반짝거리던 발레타의 밤. 18미터 높이의 트리탑 워크웨이에 올라 내려다본 런던 큐가든의 푸르른 녹음. 언제 다시 그곳에 갈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애틋하고 그리운. 내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이 시간에도 피너클스 사막에는 노을이 지고, 발레타의 밤하늘엔 별이 뜨고, 큐가든의 커다란 나무들이 물결치듯 일렁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답답했던 마음이 환기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떠올리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풍경들이 있겠지요.

 

어린 시절에 본 풍경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언젠가 어른이 되어 다양한 인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사람의 말이 아니라, 언젠가 본 풍경에게 위로를 받거나 용기를 얻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 호시노 미치오, <긴 여행의 도중> 중에서

<긴 여행의 도중>을 읽고 저에게는 알래스카 여행이라는 꿈이 생겼습니다. ‘뭣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나를 둘러싼 좁은 세계 안에서 종종거리다 마음이 걸려 넘어질 때, 저는 종종 지구 반대편 혹등고래의 우아한 춤을, 오로라의 신비한 빛을 떠올립니다. 사는 동안 알래스카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용기를 내어 알래스카에 간다고 하더라도 수면 위로 올라와 바람을 느끼는 혹등고래와 온 하늘 가득히 춤추는 오로라를 볼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요. 어쩌면 우리의 인생은 혹등고래와 오로라를 담지 못한 채 끝이 날 거예요.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보는가 아닌가에 상관없이 같은 지구상의 어딘가에 혹등고래가 바다 위로 솟구쳐 오르는 세계가 있다는 것,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띠가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 언젠가는 그 풍경과 마주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가능성을 품고 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2. 유진목, <디스옥타비아>

<디스옥타비아>는 흑인 여성이자 페미니스트인 미국의 SF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세계관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그려 본 유진목 시인의 SF 소설이자 미리 쓴 일기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2059년,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은 때”를 맞이한 78세의 유진목 시인이 ‘모’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세계입니다. 왜 살아야 하는 걸까.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무조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절망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져 묻는 저에게, <디스옥타비아>는 정답이 아닌 해답을 알려 준 책입니다. 하늘과 바다에게 왜 존재하냐고 묻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단지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거라고,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고요.

 

작년 가을, 제주로 2박3일 치료 종료 기념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 마지막 날, 비행기 시간 때문에 친구가 먼저 떠나고, 혼자 남은 저는 전날 들렀던 쇠소깍 해변을 다시 찾았습니다. 마침, 벤치 하나가 비어 있었고, 자리에 앉으니, 정면으로 섬 하나가 그림처럼 놓여 있었지요. 탁 트인 푸른 하늘과 윤슬이 내려앉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자꾸 눈물이 났습니다. 내가 지금 살아 있어서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구나.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이렇게 다 나아서 여행을 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는데. 지금 살아 있어서 좋다, 지금 살아 있어서 좋아. 이 말을 몇 번을 내뱉었는지 몰라요. 어제 우연히 이곳을 발견해서, 숙소가 근처라서, 마침 이 벤치가 비어 있어서,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지 않아서, 지금 이 순간 누릴 수 있는 행복. 나를 살고 싶게 만드는 평범하지만 기적 같은 생의 기쁨들.

 

살아오는 동안에 나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의 신이 되어야 하고 스스로 행운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쁜 일은 어쨌든 생기거나 안 생기거나 하는 것이었다. 누구도 그걸 막을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신이 될 수 있을 뿐이다. – 유진목, <디스옥타비아> 중에서

생의 요령을 깨우친 다음부터 살아간다는 것이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살아 있고 싶게 만드는 순간에 스스로를 데려다주기만 하면 되니까요. 갑자기 찾아오는 질병이나 사고처럼 세상엔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행운을 만들어낼 줄 아는 아주 작은 전지전능함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스스로의 신이 될 수 있을 뿐이니까요.

3. 최진영, <내가 되는 꿈>

최진영 작가의 장편소설 <내가 되는 꿈>에는 두 명의 ‘태희’가 등장합니다. 십 대의 태희와 삼십 대의 태희이지요. 삼십 대의 태희는 모든 것을 미루며 살고 있습니다. 회사 일도, 오랜 친구의 생일 축하도,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 새로운 집을 알아보는 일도, 병원 진료도, 집 청소도, 자신을 배신한 남자 친구와 헤어지는 일도, 그리고 어린 시절 자신을 길러 준 외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까지도요. 그러다 우연히 들어간 카페에서 태희는 1년 후 봉투에 적힌 주소로 편지를 보내 준다는 우체통을 발견합니다. 오늘 내가 쓴 편지를 1년 뒤에 받아도 괜찮은 사람, 그때까지 사이가 틀어지지 않을 사람,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 편지 내용을 비밀에 부쳐 줄 사람에게 편지를 써요. 바로 자기 자신에게요. 

 

희한하게도 그 편지는 1년 후 자신이 아닌 과거의 자신에게로, 십 대의 태희에게 배달됩니다. 어린 태희 역시 어른 태희처럼 누구에게라도 꺼내어 놓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고 말 것 같은 감당하기 힘든 시간을 통과하는 중입니다. 자신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잘못 배달된 한 통의 편지에, 어린 태희는 어디에도 내보일 수 없었던 솔직한 마음을 써서 보냅니다.

 

‘나는 한 명뿐’이라고 생각하면 막막하다. 이 삶을 혼자서 책임져야 한단 말인가? 그럴 때 여러 나이의 나를 떠올린다. 일곱 살, 열다섯 살, 스물세 살, 서른여섯과 마흔여덟 살, 쉰아홉 살, 기타 등등의 나를. 스스로가 너무 못마땅해서 끈적끈적하고 희뿌연 기분에 잠겨 버릴 때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와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여기 나는 무겁게 지쳐 있으나 거기 나는 상심을 털어내고 웃고 있구나.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힘이 난다. 책임감이 조금씩 단단해진다. – 최진영, <내가 되는 꿈> 중에서

스스로가 한심하다 느껴질 때, 용기를 그러모으고 싶을 때, 제가 종종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뭐라 말할지 생각해 보는 거예요.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인생이 망한 줄 알았던 열아홉 살의 내가, 고된 서울살이에 회사 화장실에서 몰래 울던 스물셋의 내가, 책방을 열고 싶다고 애태우던 스물일곱의 내가, 지금 나를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그렇게 생각하면 어쩐지 용기가 나더라고요. 스무 살의 내가 서른 살의 나를 상상하지 못했듯이 마흔 살의 나도, 쉰 살의 나도, 상상 이상으로 멋질 것 같다는 대책 없는 믿음 덕분이겠지요.

 

반대로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뭐라 말할지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모든 치료를 끝내고 무사히 일상으로 돌아온 내가, 현실을 믿을 수 없어 휠체어에 앉아 멍하니 있던 과거의 나에게, 점점 더 나빠지는 상황에 비상계단에 숨어 엉엉 울던 나에게, 딱 일 년이면 원래 네가 있던 자리로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돌아갈 수 있다고, 그 사이에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생기지만 너는 잘 겪어 낼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5년 후, 10년 후, 암에 걸렸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만큼 건강해진 미래의 내가, 재발과 전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종종 잠을 설치는 지금의 나에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토닥이는 상상을 하는 거예요. 재발이 되었지만 지금처럼 씩씩하게 치료를 끝내고 회복한 미래의 내가 넌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고, 스스로의 회복력을 믿어도 된다고 말해 주는 날도 있고요.

 

우리 앞에 얼마만큼의 기쁨과 슬픔이 기다리고 있을지, 우리가 그것들을 어떻게 통과해 나갈지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해요. 우리는 우리를 꼭 웃게 할 거라는 것.


글. 정지혜

한 사람을 위한 ‘사적인서점’ 운영자. 좋아하는 마음이 다음엔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기대하며 살아간다. 책 <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와 <좋아하는 마음이 우릴 구할 거야>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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