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한수희의 일기] 오늘은 오늘 일만

이것이 가을을 위한, 그리고 다가오는 겨울을 위한 나의 마음의 준비다.

한수희 작가

가을은 좋은 계절이다. 일단 날씨가 좋으니 사람이 느긋하고 여유로워진다. 햇빛도, 바람도, 온도도 모든 것이 적당하다. 그걸 쾌적하다고 부른다. 너무 짧다는 것만 빼면 가을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그러나 슬프게도 감정적으로 불안한 사람에게 환절기는 쥐약이다. 내게 가을은 여름과 겨울 사이의 기나긴 환절기로 느껴진다. 환절기가 되면 일단 잡생각이 많아진다. 한 생각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위험 신호다. 이럴 때, 마음이 불안하면서 에너지가 넘칠 때 내게는 노트와 스케줄러가 간절하다. 나는 계획을 세우고 싶다. 어서 빨리 내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싶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닥쳐올 모든 불운과 불행을 피해갈 수 있을 계획을.

후회를 두려워해 미래를 품에 안았던 아이

고3 때였다. 수능시험 다음날이었다. 점수를 매긴 아이들이 교실 여기저기서 울었다. 나는 의아했다. 아니, 왜 울지?(맞다, 나 T….) 설마 몰랐던 거야? 그런 점수가 나올 줄? 나는 그 아이들이 공부 대신 빈둥대는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에 우는 모습에 당황했다. 나는 미래에 대비하는 마음으로 공부했다. 지금 공부를 안 하면 후회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공부했다. 그래서 나는 울지 않았다. 잘한 것도, 잘못한 것도 다 내가 한 일의 인과응보였다.


나는 원래 그런 애였다. 더 어릴 때는 지구 멸망에 대비한 피난 계획까지 머릿속으로 수십, 수백 번 세우고 수정하길 반복했다. 일단 앞집 노마 아빠네 오토바이를 훔쳐야 했다.(괜찮다. 그 집엔 차도 한 대 있으니까.) 그 작은 오토바이에 우리 가족 넷이 다 타려면 어떤 순서로 앉아야 할지 구체적으로 그리고 또 그렸다. 무얼 가지고 가야 할지, 무얼 버려야 할지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건 어릴 때는 즐거운 몽상 같은 거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를 갉아먹는 악취미가 되어버렸다.


미래를 생각할수록 힘들어졌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그 커피를 다 마시고 났을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좋은 시간을 보내다가도 그가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되거나, 그가 사라질 때를 생각하면 슬퍼졌다. 여행지에 가서도 내가 돌아가서 이 풍경을 얼마나 그리워할지를 생각하면 울적해졌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에 거리를 두고 싶었다. 그래야 나중에 힘들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의존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달리기를 열심히 하면서도 어느날 갑자기 달릴 수 없게 되면 어떨지 불안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내 곁을 떠나거나, 집을 잃게 되거나, 하다 못해 좋아하는 맥주를 사 마실 경제력을 잃게 되지나 않을지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홀로 살아남을 작정이었다. 모든 게 사라져도 나는 존재할 테니까. 반대로 내가 사라지면 더 이상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나를 멈춰 세운 그날의 질문

얼마 전의 어느 저녁이었다. 그 즈음 나는 매일 스케줄러의 일정이 차 있을 정도로 계속 뭔가를 하고 있었다. 문득 무거운 감정이 밀려왔다. 저녁마다 쿵후를 하거나 달리기를 하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좋아하는 카페에 가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는 일을, 뭔가를 잊으려는 듯 계속 해치우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런 일에 울적해지는 나 자신을 탓하며 주저앉았겠지만 그 날만큼은 거기에 대해 더 파헤쳐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해 봤다. 그럼 그 대신에 무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음… 무얼 해야 하는가 하면… 가만히 앉아서 미래를 걱정하기? 그거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밖에 없었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미래를 걱정하다 보면 반드시 마음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그걸 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 미래를 방기해서는 안 된다. 결국 내게 운동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미래를 걱정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동네 친구가 하나 있다. 나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그는 뭐든 쉽게 잊어버린다. 심지어 그는 너무 먼 미래까지 생각하는 게 싫다고 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랬다. 그게 싫다고?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닌가? 나는 그를 좋아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제야 그 친구의 말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를 자꾸 생각하다 보면 현재는 해치워야 할 과제처럼 보이게 된다. 그렇게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2025년의 아름다운 가을 날들을, 하수구로 흘러 들어가는 목욕물처럼 흘려버리게 될 것이다.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날려 버리는 나야말로 무책임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미래를 생각하고 싶은 충동이 들 때, 계획을 세우고 싶어질 때 워워, 잠깐만, 하고 스스로를 멈춰 세운다. 계획도 좋지. 하지만 계획대로 되는 게 인생이던가? 계획을 세우다 보면 미래의 불안 요소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를 일들을 파헤칠수록 점점 더 불안해진다. 그래, 그럴 바엔 그냥 운동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좋아하는 카페에 가자. 그건 무책임한 태도가 아니다. 그건 잘 살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다. 좋은 날들을 만끽하자. 흘러가는 대로 살자. 그렇게 나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평범한 하루가 쌓여 인생이 된다

요즘 나의 주문은 ‘오늘을 살자’다. 뭔가에 막힐 때마다 외우는 구호 같은 거다. 아, 물론 전에도 그 말을 모르지 않았다. 실천도 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래에 고정된 내 시선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걸 깨닫자 그제야 마음이 달라졌다. 이유 없이 초조하고 조급해질 때마다 주문을 외워본다. 오늘을 살자. 그렇게 컵 하나를 치우고 가방을 제자리에 건다. 식탁 위를 꼼꼼히 닦고 쓰레기를 주워 버린다. 오늘을 살자. 그러다 보면 하루가 지나가 있다. 별 거 아니네. 별 거 아니야. 이렇게 별 거 아닌, 평범한 하루와 하루가 쌓이고 쌓여서 인생이 되는 것일 뿐이야.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이야.


한때는 저녁이 두려웠다. 해가 질 무렵이 되면 마음이 추라도 드리운 듯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이 저녁을 또 어떻게 버티지? 나는 겁에 질렸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 저녁식사를 차리고 집을 나와 쿵후 도장에 가거나 트랙으로 달리러 간다. 집에 돌아와서는 샤워를 하고 맥주 한 캔을 따고(종종 무알콜 맥주를 따고) 재미있는 드라마나 영화를 본다. 쿵후도 달리기도 하지 않는 날은 좋아하는 카페에 간다. 카페에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글을 쓰며 휴식을 취한다.


좋은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게 기분이 좋아지면 나처럼 비관적인 인간도 어느새 낙관적인 인간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좋은 생각들을 나의 뇌에 각인시키기 위해서 일기도 써보곤 한다. 일기라기보다는 메모 같은 것인데, 오늘의 좋았던 일과 잘한 일을 쓴다. 정말 별 거 아닌 일도 쓴다. 어제의 좋았던 일. 달리기가 너무 재미있었다. 오늘의 좋았던 일. 돈가스가 맛있었다. 내일의 좋을 일. 점심 외식을 할 것이다. 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이렇게 나의 뇌에 긍정적인 기억을 많이 새기려 한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여전히 의심 많은 내 안의 내가 묻는다. 내 답은 단호하다. 이렇게 살아도 돼. 이렇게 살아도 괜찮아. 그걸 알기 위해서 이렇게 오랜 길을 돌아왔어. 가끔 허탈해지기도 한다. 나는 왜 이렇게 비효율적인 인간일까? 남들은 날 때부터 아는 사실을 왜 나는 이렇게 오래, 무수히 많은 것들과 싸우며, 힘겹게, 겨우 겨우 알게 되는 걸까? 그러나 이런 인생에도 장점은 있다. 어렵게 얻었기 때문에 더 귀히 여길 줄 아는 것. 먼 길을 둘러왔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던 것.

시시콜콜한 선택들이 쌓아올린 단단한 하루

최근에 읽고 있는 책 <시대예보 : 경량문명의 탄생>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의무의 삶에서 향유의 삶으로 바뀐 지금, 이제 하루하루는 더 이상 과거의 신병 훈련소에서 단체기합을 받던 시간처럼 빨리 지나가길 바라던 고통의 순간이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는 매일 자라는 사랑스러운 아이의 ‘지금’ 모습을 담기 위해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누르듯, 매 순간을 깊게 느끼고 반추하는 짙은 나날을 살아가길 바라고 있습니다. -송길영, <시대예보 : 경량문명의 탄생> 149p


매 순간을 깊게 느끼고 반추하는 짙은 나날. 그래, 그거다. 오늘을 산다. 어제와 내일에 대해서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삶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것들도 분명 존재한다.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일 아침은 몇 시에 눈을 뜰까? 아침식사로 무얼 먹을까? 어떤 길로 출근할까? 어떤 음악을 들을까? 점심식사로는 무얼 먹을까? 어떤 사람을 만날까? 어떤 대화를 나눌까? 퇴근 후 어떤 일을 할까? 잠들기 전에는 무엇을 할까? 그런 시시콜콜한 일들이다. 아무쪼록 그것들을 좋은 것들로 채우고 싶다. 그렇게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또다른 내일을 맞이하고 싶다. 끝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찾아오더라도, 그 전까지 나는 그렇게 잘 살아나가고 싶다. 그것이 가을을 위한, 그리고 다가오는 겨울을 위한 나의 마음의 준비다.




[지혜의 서재] 한 해를 차분하게 마무리 하기 좋은 책 3

연말에 함께 하기 좋은 세 권의 책을 추천합니다.

황지혜 독립서점 <지혜의서재 > 운영자

[웃따의 마음 돋보기] 다정의 우선순위

내가 가장 먼저 다정을 베풀어야 하는 사람은 나입니다.

웃따 상담심리사, 유튜브 <상담심리사 웃따> 운영자

[큐레이션] 불안에 떨었던 나의 20대에게 보내는 시

“당신의 불안은 멋진 트로피가 될 것이기에”

플레이라이프 with 포엠매거진

저는 우울증 환자의 보호자입니다

소중한 사람이 우울증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면, 꾸준히 치료를 받아서 일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 주세요.

최의종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