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다가오는 어느 오후, 19년째 책을 만들고 있는 편집자이자 이야기장수의 대표, 이연실 님을 만났습니다. 작가를 꿈꾸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수많은 작가의 삶의 조각을 책으로 엮어내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아직도 마음은 간장 종지만 하다”고 말하는 분이죠. 실수도 많았고 울컥하는 순간도 적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더 나은 문장을 고르고 조금 더 좋은 마음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여기까지 걸어왔다고 했습니다.
작은 마음이라도 무엇으로 채우느냐가 중요하다는 그의 말에는, 오래도록 타인의 이야기를 품어온 편집자의 단단함과 다정함이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작가의 꿈을 접고 편집자로 들어섰던 초년 시절부터 ‘사고의 여왕’으로 불리던 도전의 시간들, 그리고 지금도 계속 마음을 다져가며 배우는 그의 여정은 흔들리는 청년들에게도 조용한 위로가 될지 모릅니다.
요즘 어떤 시간을 보내고 계신가요?
올해 나올 마지막 책 작업을 하고 있어요. 출간 시점이 정해진 터라 막바지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네요. 인터뷰하는 지금도, 다음주에도 마감이 있어서 정신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책을 좋아하던 아이’에서 ‘이야기장수’ 대표가 되기까지, 그 여정이 궁금해요.
어릴 때부터 꿈은 하나였어요. 소설가요. 책을 너무 좋아했고 책은 ‘작가의 것’이라고만 생각하던 아이였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국문과에 진학했고, 등단도 금방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생각과 달랐죠. 내 청춘은 망했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 시절엔 ‘국문과에서 작가로 잘 안 풀린 애들이 출판사로 간다’는 말이 있었는데, 저 역시 그렇게 오해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형벌을 준다’는 마음으로(웃음), 또 ‘1년만 벌고 도망가자’는 마음으로 출판사에 들어갔던 거예요.
첫 직장이 ‘문학동네’였죠. 출판사에 들어가 보니 어땠나요?
편집자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작가를 뒷받침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작가의 그림자, 혹은 작가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 너무 재미있었어요. 책은 작가의 것인 줄만 알았는데, 책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그때부터 작가의 꿈을 잊었어요. 그리고 제가 제일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 되어버렸죠.
편집자의 어떤 매력이 그렇게 마음을 사로잡았나요?
작가를 꿈꿀 때는 제가 주인공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 일은 ‘타인의 생각을 자꾸만 내 안으로 들이는 일’이에요. 마케터가 좋아하는 것과 작가님이 좋아하는 것, 사장님이 좋아하는 게 다 다른데, 그걸 제가 융합해야 해요. 저는 편집자를 ‘북 디렉터’라고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데, 모든 것을 감독하는 역할이지만, 내 것은 아닌 거예요. 편집자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조금씩 사람들에게 기대서 가는 일이에요. 이제 곧 편집자도 20년차를 바라보고 있는데 지치지 않는 이유가 계속 배우는 일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제가 틀리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계속 공부하게 하는 일이니까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힘든 점은 없어요?
아플 때요. 아프면 일을 못 하니까요.(웃음) 책 만드는 일은 되게 정직해서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쏟은 만큼 달라져요. 그러다보니 시간을 많이 쏟게 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그만하면 되지 않냐”고 말하기도 해요. 그러면 저는 “제가 거북이라서 그래요”라고 말하죠. 천천히 그러나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떠올려보고, 그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최상의 것을 하나 뽑으면 그건 정말 좋을 수밖에 없거든요.
편집자로서 ‘틀림’을 받아들이는 과정엔 어려움이 없었나요?
일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어요. “왜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안 할까?” 하는 마음이요. 제가 좋아하는 책 중에 <영초언니>가 있는데요. 이 책을 만들 때부터 최소 천만 부는 팔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덜 팔리더라고요. 너무 속상해서 회사 가는 길에 운전대를 잡고 울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때 거울을 보니 제 얼굴이 너무 못나 보이더라고요. 제가 얼굴 시뻘개져서 울고불고하는 순간에도 마케터들은 이 책을 베스트셀러에 올리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저는 그분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던 거죠. 제 아집이 너무 못나고 무섭게 느껴졌어요.
에세이 편집자는 타인의 삶을 다루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조심스러운 지점도 많을 것 같아요.
저는 ‘작가 복 많은 편집자’라는 말을 자주 들어요. 좋은 작가들과 작업하면서 느낀 점은 좋은 글을 쓰는 분들은 좋은 삶을 사는 분들이고, 결국 ‘좋은 사람’이더라고요. 그 삶이 독자에게 잘 드러나도록 하는 게 제 역할이고요. 책에서 다뤄지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작가의 역경이었거나 고난이었을 순간이거든요. 그래서 그걸 단순히 책이 잘 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지 않으려고 해요. 저에게 삶의 한 조각을 케이크처럼 내어주신 거니까, 저는 그 케이크에 불을 붙여 사람들에게 잘 알리는 역할을 하면 되는 거예요.
대표님이 생각하는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좋은 사람은 주변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좋은 일들을 찾아나서는 사람 같아요. 김훈 선생님 말 중에 제가 마음속에 늘 담아두는 말이 있어요. ‘잘 산다는 것은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까운 이웃들에게 잘하는 것이다.’ 제가 만난 좋은 작가들은 가까운 이웃에게 정말 잘해요. 에세이는 확성기로 자기 얘기만 해서는 좋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거든요. 자기 얘기 속에서도 주변의 좋은 것들을 찾아내는 사람, 그래야 세계가 넓어지는 것 같아요.
교정지를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표현하신 게 인상적이었어요.
편집자는 문장 감각이 있는지가 중요한데요. 아무리 뛰어난 문장 감각을 가진 편집자라도 이걸 되게 두려워해야 해요. 작가의 글을 단지 나의 문장력을 뽐내기 위해서 고치면 안 되거든요. 고친 이유를 작가님이 이해할 수 있게 하나하나 설명 드려야 하고요. 비단 글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해당돼요. 누군가의 생각에 어긋나는 판단을 내려야 할 때도 설명이 필요하거든요. 내가 왜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설명할 줄 알아야 하죠.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건 없어요. 직종과 상관없이요.
한편으로는 글이라는 게 옳고 그름으로 설명되는 분야가 아니기도 하고, 회사라는 공간이 자기 표현을 속시원히 하기 어려운 환경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그런데 일할 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자기 주관과 기준은 있어야 해요. 다른 사람이 내 의견에 반대해도 내 주관이 있으면 오히려 더 받아들일 수 있는 품이 생기거든요. 그런데 이 말도 맞는 것 같고, 저 말도 맞는 것 같으면 일도 망치고 나도 망쳐요.
‘사고의 여왕’이라 불릴 만큼 도전적인 시기를 많이 보내셨다고 들었어요. 그 시절의 도전들이 지금의 대표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이야기장수에 지금 저같은 신입이 들어오면 아주 골치 아플 것 같아요.(웃음) 그 정도로 많이 사고를 쳤거든요. 그런데도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 그때마다 저를 감싸안아준 조직과 좋은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예전에 어떤 선배가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네가 사고를 치는 건 일을 했기 때문이야. 큰 사고면 신입인데 큰 일을 맡았기 때문이고, 고생했다”. 그 말이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몰라요. 제 첫 회사였던 문학동네는 큰 조직이지만 시도와 도전을 허락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제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이 “그냥 해봐”였을 정도로요. 그래서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부딪힐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힘든 일이 터지면 ‘여기까지인가’ 싶지만, 끝이 아니더라고요. 절대 끝이 아니에요.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늘 이런 얘기를 해요. 내가 잘할 때도 온전히 내 덕분만은 아니고, 내가 못할 때도 온전히 내 잘못만은 아니라는 걸 꼭 기억하라고요.
잘될 때도 언젠간 끝이 있고, 안될 때도 언젠가 끝이 있다는 말이네요.
잘 되다가 곤두박질 칠 때도 나한테 쿠션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정점을 찍을 때도 주변에서 제가 상기되지 않도록 자제해주는 사람들이 있고요. 그러니까 내가 나한테 너무 골몰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아요. 일도 그렇고 삶도 그렇고요.
요즘 자신의 길을 찾으려는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젊은 분들에게 뭔가 조언을 한다는 게 사실 미안할 때가 많아요. 제가 사회초년생일 때도 조직에 들어가는 게 쉽지 않았는데, 지금은 출판계가 더 어려워져서 신입을 거의 뽑지 않으니까요. 출판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다 힘든 시기라서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라는 말도 때로는 사치처럼 들릴 수 있죠.
그래도 저는 이런 생각을 해요. ‘어차피 무슨 일을 하든 다 힘들다’(웃음) 좋아하는 일을 하든,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든, 결국 다 힘들다면 마음을 줄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내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조그마하게라도 늘리다 보면 어느 순간 길이 보여요.
또 꾸준히 한 길을 가다가도 ‘이게 아닌가?’ 싶어 샛길을 기웃거리게 되잖아요. 저는 그 샛길이 결국 자기 길이 되어버리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어렸을 때 꾸던 꿈을 이루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기회는 계속 생겨요. 무대의 가장자리에서도 빛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자신의 자리에서 그런 사람이 되면, 결국 어느 곳에서는 반드시 빛나게 돼요.
대표님을 보면 마음의 크기를 단단히 키워온 사람이라는 인상이 들어요. 대표님이 생각하는 ‘마음성장’이란 무엇을 의미하나요?
“막내 편집자로 시작해서 대표까지 오긴 했지만, 제 마음은 아직도 간장 종지만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자꾸 흘러넘치고, 울컥하고 그래요. 이 마음의 그릇을 사발만큼 키우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 마음이 작다면, 그 안에 좋은 것들이 흘러넘치게 하면 되지 않을까?’
내 마음과 내 눈물, 내 땀만 채우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서 숙성된 좋은 것들, 좋은 마음, 좋은 영향들을 종지 안에 담아야겠다고요. 저는 늘 큰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나는 애초에 크게 될 그릇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그걸 인정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저에게 마음성장은 마음의 크기를 키우는 일이 아니라, 그 작은 마음을 무엇으로 채울지 선택하는 일에 가까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