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연극 배우 임동현의 마음성장 키워드
자존감
현실 앞에 꿈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습니다. 무대는 점차 줄어들고, 수없이 오디션에 떨어지다 보면, 아무리 자존감이 높다는 사람도 의기소침해지지 않을 순 없겠지요. 하지만 배우 임동현 님은 일단 자신을 믿고, 주어진 매일에 최선을 다해 부딪쳐 보는 사람입니다.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나요?
저는 원래 엄청 소심한 성격이었어요.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사귀게 된 친구들이 랩을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랩을 찾아 듣기도 하다가, 친구들이랑 축제에서 공연까지 했어요. 작은 무대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공연을 하고 나니까, 너무 재미있어서 또 하고 싶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친구 한 명이 연기학원을 간다고 하길래 궁금해서 따라가 봤죠. 교실 가운데 서서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이것도 공연이잖아. 나도 연기해 보고 싶은데?”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했고, 이게 연기를 시작하게 된 첫 번째 계기인 것 같아요.
연기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집안의 반응은 어땠는지.
처음에는 어머니께서 반대를 하셨어요. 그렇게 어머니를 설득하는 데 6개월 정도 걸렸는데, 그 과정에 ‘인생 그래프’를 만들어서 보여 드렸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터무니 없긴 한데. 열여덟, 열아홉부터 열심히 준비해서 스무 살에 연기 전공을 시작해 군대 전역 후 스물세 살에는 본격적으로 무대에 서고 내 연기를 눈여겨 본 연출자에게 캐스팅을 당할 것이라는 식으로 40대 후반까지의 인생을 상상하며 소설을 썼거든요. 어머니께서 그걸 보시고는 뭔가 해보겠다는 강한 의지를 느꼈던 것 같아요. 이대로 할 수 있겠냐며 한번 해 보라고, 도와주겠다고 웃으며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때 작성했던 인생 그래프대로 실천하며 살아왔나요?
조금씩 늦어지기는 했지만, 나름 엇비슷하게 살아온 것 같아요. 우선 재수를 해서 스물한 살에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했고요.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조연출 생활을 시작해 거의 모든 공연에 다 참여했어요. 그런데 졸업은 조금 두렵더라고요. 울타리 밖을 나가는 거잖아요. 오디션에 계속 지원하면서 이곳저곳 돈을 벌러 다녔어요. 배우로서 다양한 경험도 쌓을 겸 조금 독특한 일들을 했었는데, 그중에서 까치집 털이를 하러 갔던 게 기억에 남네요. 지방 쪽은 아직도 전봇대가 남아 있는 곳이 많거든요. 졸업을 하자마자 속초에 가서 변압기 사이 까치집 부수는 작업을 세 달 정도 했어요. 물론 힘들기도 했지만 재미있었던 경험이에요. 지금도 가끔 딜레마가 오면 그때를 떠올리면서 ‘그래, 이것도 경험이지.’라고 생각하곤 하니까요.
그렇다면, 졸업 후 배우로서의 첫 무대는?
2019년, 혜화에서 했던 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가 저의 첫 작품이었어요. 뮤지컬계에서 잔뼈 굵은, 소위 ‘잘 하는’ 배우 분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두 달 만에 갑자기 막을 내리게 됐어요. 말 그대로 공연이 엎어진 거죠. 페이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할 정도로 제작사에 문제가 많았거든요. 졸업 후 첫 번째 공연이 그렇게 되어서 많이 아쉬웠지만, 짧은 시간 무대에 설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연기하고 노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뻤고, 무대 위의 플레이어로서 꼭 연기를 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저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거나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일을 좋아하고, 그렇게 할 때 성취감을 느끼는 편이거든요. 매일 다른 관객을 만나 그들에게 에너지를 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어요.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일을 할 때
성취감을 느끼는 편이거든요.
매일 다른 관객을 만나 그들에게
에너지를 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어요.”
에너지를 줄 수 있는 다른 일들도 많잖아요. 꼭 무대여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어릴 때부터 뭔가 하고 싶은 일이 뚜렷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연기하고 노래하는 순간만큼은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이 모든 걸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직업이 뮤지컬 배우밖에 없었고요. 작품 속의 배역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배역에 대한 감정을 서로 공유하고 또 다양한 사람들과 같이 호흡하는 그 무대라는 곳이 좋아요. 무대에 섰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있거든요. 그래서 계속하게 되는 것 같고요. 공연 준비를 하다 보면 노력해도 해결이 되지 않는, 탁 막히는 순간이 있어요. 포로수용소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일곱 명의 각기 다른 캐릭터가 등장하는 블랙 코미디 작품이 있었는데, 아무리 합을 맞춰도 매끄럽지 않았던 코믹한 장면이 막상 무대에 올라 관객들의 호흡과 웃음이 나오니 자연스럽게 해결이 됐어요. 상황에 몰입하다 보면 그 순간 배우들끼리 신기한 호흡이 나오기도 하고. 영상은 카메라로 담고 편집하는 과정을 거치지만, 연극이나 뮤지컬은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전달할 수 있잖아요. 매번 예측할 수 없지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현장감 때문에 무대에 큰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사회적 거리두기가 길어지면서 공연도 취소되고, 꽤 힘든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공연이 계속 취소되다 보니 오디션 기회가 없잖아요. 힘들어서 꿈을 포기할까 생각한 적도 있어요. 연기자 대신 공연 기획자로 전향하려고 했는데, 무대 위에 서 있는 친구들이 너무 부럽더라고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저를 은사님께서 잡아주셨죠. 선생님도 30대가 되면서 배우의 길을 접고 다른 일을 했는데, 도저히 참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고 하시더라고요. 다른 일을 했던 그 5년 동안 더 도전했으면 한두 계단은 더 올라갈 수 있었을 텐데, 그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요. 선생님 말씀을 듣고 그동안 얼마나 최선을 다해 부딪쳐 봤는지 돌이켜 보게 됐어요. 무작정 기다리지 말고 일단 도전해 보자는 결심을 했죠. 기회가 생기면 무조건 지원하고, 프로필 투어를 다니기도 했어요. 예전에는 직접 오디션장에 가서 연기와 노래, 안무를 보여 드렸는데, 지금은 영상을 찍어서 제출해야 하거든요. 자투리 시간을 내서 영상을 촬영하고 연습하는 과정을 계속 반복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오디션을 한 달에 아홉 번 본 적도 있어요.
“처음에는 떨어질 때마다 타격을 받았어요.
그런데 열 번 넘게 오디션을 보면서
과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다 보니
이제는 아무렇지 않아졌어요.”
오디션에 계속 떨어지면, 멘탈을 다잡고 다시 도전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처음에는 떨어질 때마다 타격을 받았던 것 같아요. 하고 싶었던 작품인데 떨어지면 상처가 되죠. 왜 나를 뽑지 않았을까 고민에 빠지고,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게 되거든요. 의욕도 자신감도 점점 떨어지고 하루가 완전 망가지더라고요. 그런데 열 번 넘게 오디션을 보다 보면 하나하나 신경 쓸 틈이 없어요. 당연히 있는 일이다, 과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다 보니 이제는 아무렇지 않아졌어요. 그래도 힘든 상황이 올 때는 최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요. 집 앞에 도림천이 있는데, 그냥 좋아하는 노래 들으면서 달려요. 이제 생각은 그만하고, 오늘 하루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을 다잡는 거죠.
자존감이 무너지는 순간을 극복하는 방법이 있나요?
제 연기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을 때는 자존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최대한 상황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해요.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을 테니까요. 내 연기가 다른 사람들 눈에 왜 그렇게 보였을까 한번 돌이켜보고, 더 열심히 연습해요. 자신을 믿으려고 노력하면서요. 아직 완벽하게 저를 믿지는 못하지만, 단 한 명일지라도 잘한다고 이야기해 줄 때 ‘그래, 나를 믿고 가자.’는 생각을 해요. 저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사람들로부터 확인받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를 자신감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분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고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나만의 길을 갈 수 있는 마음의 힘은 어디서 얻으시나요?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요. 만나서 대화하다 보면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거나 저보다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분들도 있어요. 걱정하지 말고 나만 생각하면 된다는 간단명료한 말 한마디에 용기를 얻죠. 친누나도 원래 예술 계통에서 일을 했어요. 그래서 저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공감해 주고, 결정을 내릴 때 도움을 줘요. 고민이 있을 때는 누나에게 무작정 털어 놓기도 해요. “네가 무대에 서 있는 모습을 보니까 왜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지 알겠다.”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는데, 그 말이 정말 큰 힘이 되더라고요. 무대에서만큼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인다고요. 그래서 목표점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어요. 지금 아르바이트를 2개나 하고 있거든요. 누군가의 눈에는 불안정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저런 일들을 하면서 배우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과정 속에서 배우는 게 많아요. 덕분에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 가능성이 많이 열려 있다는 게 장점이기도 해요.
혹시 동현님만의 연기 철학이 있나요?
항상 ‘진심’으로 임하는 배우가 되자는 좌우명이 있어요. 왜냐하면, 진심은 통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진심이 아니라도 연기를 할 수는 있지만 언젠가는 들키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좋은 사람’이 ‘좋은 연기’를 한다고 생각해요. 거짓을 말하지 않는, 남을 배려하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 것 같고요. 그래서 가끔씩은 제 자신에게 엄격해지기도 합니다.
“지금은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해
달리고 있는 느낌이고,
아직 그 발돋움판이 오지 않은 것 같아요.”
앞으로 배우로서의 최종 목적지를 그려 본다면.
저를 소개할 때 “배우 임동현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어요. 최종 목적지를 구체적으로 그려 본 적은 없지만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오직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 좋은 배우로서 자리 잡는 게 목표입니다. 10명이 모여 있으면, 비슷한 사람이 있을 수는 있어도 결국 다 다른 사람이잖아요. 모두가 다르게 생겼고 내가 쓰일 자리는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아요. 어디에서든 어떤 작품으로든. 회사에서도 팀이 나눠져 있는 것처럼 배우도 똑같은 것 같아요. 작품도 배역도 워낙 다양하니까요. 저도 배우 임동현으로서 잘 할 수 있는 게 분명히 있을 테니 장점을 살려서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야죠. 지금은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해 달리고 있는 느낌이고, 아직 그 발돋움판이 오지 않은 것 같아요.
발돋움판이 나타났을 때를 대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요?
눈에 딱 보이는 결과가 많지 않다 보니 도중에 배우의 삶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저는 끝까지 부딪쳐 보려고 해요. 손에서 놓지 않고 꾸준히 최선을 다하다 보면 분명히 꽃을 피울 거라고, 억지로 증명하려 하지 않아도 결국 언젠가는 알아줄 거라고 믿어요. 최악의 조건에서도 최선의 노력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작품이 들어오더라도 제약이 없을 만큼 노래에 중점을 두고 트레이닝 하고 있어요. 배우로서 최적의 상태를 보여줄 수 있도록 자기관리도 하고 있고요.
최근 거의 5년 만에 <레미제라블> 오디션이 열렸는데, 그 작품을 꼭 함께 하고 싶어요. 언제가 될지 모를 발돋움의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점프할 수 있도록, 매일매일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서 기다리는 과정을 즐겨보려고 합니다. 많이 부딪치다 보면 문틈이 조금씩 열리지 않을까요.
어제 만난 나의 행복이 있다면요.
다행히 저희 팀만 공연이 미뤄지지 않았어요. 요즘에는 무사히 그리고 끝까지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과 행복을 느낍니다. 언젠가 다시 좋아질 날을 위해 잘 준비해야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어떤 순간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자존감이라고 우리는 착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존감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믿으려고 노력할 때 얻어지는 것일지 모릅니다.
단단한 자존감이 필요할 때
“아무리 자존감이 높아 보이는 사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어떤 날은 스스로가 괜찮아 보이고, 어떤 날은 기분이 바닥 끝까지 가라앉는 경험을 하면서 그저 버티며, 수습하며, 꾸준히 살아갈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