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마음의 문을 지키는 사람

아픔이 아픔을 위로하는 순간이 있어요

김기리 연예인 게이트키퍼

초겨울의 공기가 옅게 스며들던 날, 우리는 연예인 게이트키퍼로 활동 중인 김기리 님을 만났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을 웃기는 일이 즐거움의 중심에 있었지만, 지금은 웃음의 이면을 가까이 바라보며 누군가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곁을 지키는 일에 마음이 향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변화는 누군가의 어려움을 해결하려 하기보다, 먼저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를 함께 지키려는 태도로 이어졌습니다.


거창한 해결책보다 먼저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누군가의 밤을 조금은 버티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 필요한 순간에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의 태도는, 관계가 본래 가진 가장 단순한 힘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벌써 12월이에요. 요즘 어떤 일상을 보내고 계신가요?

요즘은 하루가 그냥 지나가버리는 듯한 기분이에요. 분주함과는 조금 다른데요, 소화해야 하는 스케줄도 있고 제가 벌려둔 일도 있어서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정해진 틀 안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길을 만들어가며 나아가는 느낌이에요.



기리 님은 ‘게이트키퍼’로 활동하고 계세요. 게이트키퍼라는 역할을 처음 접했을 때 어떤 인상을 받으셨나요?

게이트키퍼는 원래 ‘문지기’, 영혼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의미예요. 저는 그중에서도 ‘연예인 게이트키퍼’로, 한 달에 한 번씩 정신의학과 교수님들과 함께 심리상담을 공부하고 앞으로 우리가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까를 도모하는 모임이에요.


연예인 게이트키퍼 모임이 만들어진 계기는 한때 연예계에서 생을 포기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던 시기였어요. 그때 장례식장에서 계속 마주치는 분들이 있었던 거죠. 경사에서 만난다면 반갑겠지만, 조사에서 얼굴을 자주 본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잖아요. 그런 상황 속에서 이성미, 송은이, 백지영, 신애라 선배님, 문지인씨가 “이대로 둘 수는 없다. 우리가 뭔가 해보자”라고 뜻을 모았고, 정신의학과 채종호·백종우 교수님이 자발적으로 도와주면서 지금의 게이트키퍼 모임이 만들어졌어요.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공식 모임을 갖고, 몇 달 전부터는 일주일에 한 번씩 더 만나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어요. 주변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 분들과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분들을 부르기도 하고요.



지난 12월 4일 ‘청년마음공감극장’에서 토크콘서트를 진행하셨어요.

청년들이 가진 여러 아픔을 들을 수 있었던 자리예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 느꼈던 외로움,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아 부모님의 만족을 못 채울 때의 불안함, 취업까지 했지만 여전히 부모님의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청년들의 이야기까지요. 다양한 이야기였지만 결국 모두 ‘관계의 문제’에서 비롯된 상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대는 달라졌지만 아픔의 결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느꼈어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장 공감됐던 지점은 뭐였나요?

누구나 단체 안에서 외로움을 느껴본 경험은 있다고 생각해요. 대화에 나만 끼지 못할 때 순간 밀려오는 고립감 같은 것들요. 저는 그런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비슷한 상황에서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 보니, 그분들이 어떤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더라고요. 그때의 내 감정이 상황을 확대해석한 것일 수도 있고요. 그래서 더 예민하게 타인의 감정을 살피게 된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일을 지속하며 기리 님 스스로에게도 생긴 변화가 있나요?

한 가지 크게 깨달은 게 있어요. “해결책을 주지 않아도,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자체가 해결책이다.” 상담가 선생님이 저에게 “힘든 사람에게 제일 좋은 상담은 시간과 체력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이 시대에 거론되는 심리치료법들이 정말 많지만, 실제로 문제를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건 결국 ‘이야기를 들어주는 한 사람’이라는 걸 느꼈어요. 물론 저는 상담 자격증도 없고, 전문성도 부족하지만 시간과 체력은 꾸준히 들일 수 있거든요. 그래서 ‘무조건 잘 들어주자’는 태도를 갖게 된 것이 큰 변화예요.



그러면 기리 님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신경쓰는 비언어적 행위가 있을까요?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듣고 있다는 작은 호응도 단순하지만 강력한 전달력을 가진 행위들이에요. 게이트키퍼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분 중 한 분이 저에게 비밀스럽게 말해주신 게 있어요. 사실은 본인이 공감을 잘 못한다고요. 그래서 이걸 들키지 않기 위해 더 크게 리액션을 한대요. 그런데 저는 그것조차 사랑의 행위라고 느꼈어요. 말하는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기 위해 더 노력한다는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그만큼 체력이 더 드는 일이기도 하고요.



타인을 돕는 과정에서 “이 일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라고 스스로 물었던 적이 있나요?

정신의학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 중에서 마음에 깊이 새긴 문장이 있어요. “모두에게 트라우마가 있다는 전제를 갖고 사람을 대하라.” 트라우마라는 말이 현대의학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정리되기 시작한 개념이라, 그 종류나 발생 과정에 대해 여러 시각이 존재한다고 해요. 그런데 그만큼 트라우마의 형태가 너무 다양하다 보니, 기준을 세워 구분하려고 하면 정답이 없다는 거죠. 그래서 트라우마를 어떻게 구분할지보다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트라우마가 있다”는 전제로 사람을 대하라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상대가 공격적으로 말하더라도 상처받지 않을 넉넉함이 생기고, 서로의 아픔을 존중할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이 훨씬 넓어지더라고요.



매일 감사일기를 쓰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감사일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들려주세요.

코미디언 김진수 선배님이 굉장히 지적이고 멋진 분인데, 너무 멋져 보여서 “추천해주고 싶은 루틴이 있냐”고 여쭤본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딱 하나만 추천할 수 있다면 감사일기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저희 어머님도 예전부터 감사일기를 꾸준히 쓰고 계셔서 낯설지 않았고요. 가까운 사람과 내가 근사하다고 느끼는 사람 모두 감사일기를 쓴다면, 이건 한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하게 됐어요.


전날 있었던 감사한 일 다섯 가지를 쓰는 건데, 계속 쓰다 보면 신기하게도 제가 지나쳐온 하루가 굉장히 생생해져요. 그렇게 ‘내가 그냥 지나친 순간들’이 감사로 바뀌는 거죠. 말하자면 과거를 바꾸는 위대한 행위가 되는 셈이에요. 처음엔 감사한 일 다섯 가지를 쓰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어느새 다섯 가지를 훨씬 넘기기도 하거든요. 그러면 감사의 기본값이 낮아진 느낌이 들어요. 작은 일에도 감사하게 되는 거죠.



감사의 기본값이 낮아진다는 말 되게 기분 좋은 말이네요. 주변인들에게도 감사를 표현하기도 할텐데 주변분들은 어떤 반응이었어요?

개그맨들은 많이 당황하죠(웃음). 저에게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달까요. 재미있는 이야기도 저마다의 가치가 있지만, 지금은 친구의 몰랐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에 몰두하고 있어요.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면 친구들이 “내가 이런 얘기까지 하게 되네?” 같은 반응을 보여요. 눈물을 터뜨리기도 하고, 헤어지고 난 뒤에 고맙다며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해요. 또 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인데, 나중에 “그때 너무 잘 들어줘서 고마웠다”고 말해주는 친구들도 있어요. 예전에는 사람들을 웃기는 일이 재밌었다면, 이제는 사람들과 나누는 진지한 대화에서 새로운 가치를 느끼고 있어요.



누군가의 마음이 무너질 때 옆에 있는 사람이 해줄 수 있는 가장 단순하지만 강력한 행동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들어주기’라고 생각해요. 제가 마음이 굉장히 괴롭고 인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제 고민을 상담해주신 분의 태도가 아직도 기억나요. 약 두 시간 동안 이런 선택을 했을 때 어떻고, 저런 선택을 했을 때 어떻고, 기로에 놓여 너무 고통스럽다고 이야기했는데요. 그분이 정말 긴 시간 동안 저에게 해주신 답변은 “아~”, “음~”, “그러셨군요” 이 세 가지였어요. 아무 해결책도 주지 않았지만, 그 단순한 호응만으로도 제 마음이 많이 정리되었어요.


결정은 결국 본인이 하는 것이지만,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을 함께 힘들어해주고, 시간이 조금 지난 뒤 “그 일은 어떻게 됐어?”라고 물어봐주는 태도가 정말 큰 힘이 된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기리 님에게 ‘마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예전에 교회에서 한 성도분이 자녀를 불의의 사고로 잃으셨던 적이 있었대요. 많은 분들이 와서 위로했지만, 그 말들이 잘 들리지 않았죠. 그런데 몇 년 전 똑같이 자녀를 잃은 경험이 있는 분이 장례식장 문을 박차고 들어오셔서 그분을 안아주었고, 그제서야 목 놓아 울기 시작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어쩌면 어떤 위로의 영역에서는 내 아픔이 누군가에게 진짜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왔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언젠가는 이 아픔이 나만이 줄 수 있는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보는 거예요.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내 아픔이 누군가에게 실제로 위로가 되는 순간이 찾아오면, 그때야 비로소 내 마음이 성장했다고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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