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작가, 유튜버, 교수까지 다방면으로 활동하며 이야기꾼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이종범 작가를 만났습니다. 웹툰 작가의 길을 먼저 걸은 선배이자 지망생들을 가까이에서 만나고 있는 교육자로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 이해’입니다. 좋아하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을 사랑하듯, 인생의 주인공인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할 것. 이종범이라는 캐릭터를 치열하게 분석해온 그의 이야기를 플레이라이프 독자분들에게 전합니다.
올해 연세대학교 교수직을 맡으셨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축하드려요! 개강을 앞두고 분주한 시기이실 것 같아요. 요즘은 어떤 일상과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계신가요?
개강 전이라 수업 계획서를 작성하는 데 시간을 많이 쓰고 있어요. 요즘은 유튜브 작업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어요. 원고 쓰는데 일주일을 다 쓰곤 해요. 설명회 콘텐츠를 할 때는 준비 기간 동안 작품 안에 들어가서 살다시피 해요. 지금은 <레드 데드 리뎀션 2>라는 게임 설명회를 준비 중이라 20세기 초 미국으로 가 있죠. 왜 사람들이 서부로 갔는지, 개척 시대의 사회상, 인간군상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그 외에 일상에서 루틴처럼 해온 일들은 모두 인풋을 채우기 위한 과정이에요. 아웃풋을 많이 내는 창작자인 만큼 다른 작품들을 챙겨보는 시간이 필요해요.
스토리텔러에게 호기심이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작가님이 깊이 빠져 있거나 덕질하고 싶은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큰 틀에서 제가 꾸준히 덕질하고 있는 건 인간상에 대한 분석이에요. 인기 있는 드라마가 탄생하면 그 드라마의 인물은 어떤 매력을 지녔는지 들여다봐요. 연예 프로그램도 마찬가지고요. 사람들이 공감하고, 위로받고, 때로는 화를 내며 욕하고 싶어 하는 인물은 어떤 유형인지 알고 싶어요.
앞서 말씀드린 20세기 초 미국에 대해 깊게 파고들다 보니, 서부 개척 시대가 지금 20대들의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넓은 땅에 기회를 준다고 해서 달려갔더니, 온갖 거칠고 위험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거죠. 다가오는 사람이 인사를 하러 오는 건지, 나를 공격하려고 오는 건지 알 수 없으니 자기를 보호하려고 먼저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거든요. 이런 시대의 주인공들을 분석하다 보면 2030 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소재나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덕질을 하고 있어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셨어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공부가 작가님의 직업 선택이나 삶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전공이 심리학이다 보니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데요. 사실, 저는 만화가의 삶을 일찍부터 결정했어요. 어떻게 그리는지에 대한 배움보다는 인문학 전반에 대한 공부가 도움이 될 것 같아 심리학과를 선택했죠. 제가 만화학과 교수이기도 하지만, 전공자들만으로 업계가 굴러간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체대를 나와서 만화를 그릴 수도 있죠. 만화가는 책상에 오래 앉아 일해야 하니, 건강한 신체가 장점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웹툰 <닥터 프로스트>를 약 10년간 연재하셨죠. 연재 자체도 쉽지 않은 작업인데, 그 시간을 끝까지 버텨내고 완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닥터 프로스트>처럼 엔딩이 정해져 있는 극화는 꼭 그려야 하는 에피소드나 장면, 대사가 있어요. 의무감이나 사명감, 오타쿠의 집착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오랜 시간 내 안에서 응축한 이야기를 꺼내 놓기 위해서는 또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기도 해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돼’라는 생각으로 긴 호흡의 연재를 해냈다고 생각해요. 그게 없으면 쉽지 않아요.
그럼에도 장기 연재를 하면서 번아웃을 느낀 순간에는 어떻게 극복을 하셨나요?
어떤 일이든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를 충족시켜주는 구석이 있어요. 성취감이나 깨달음, 성장 같은 거요. 그런 것들에 집중하려고 해요. 그리고, 제 상태를 인지하고 들여다보려고 노력해요. 20대에는 저도 못 했어요. 욕망은 많은데 이룰 길은 보이지 않으니 모든 신경이 외부로 뻗어 있죠. 30대부터는 결과물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스스로를 돌볼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철판도 계속 굽혔다 폈다 하면 힌지가 하얗게 되면서 언젠가는 끊어지잖아요. 끊어지기 전의 신호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어요.
결국 자신을 얼마나 이해하려고 노력했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맞아요. 메타인지라는 말이 유명해지기 전부터 후배나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면 ‘자기 이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자신에 대한 이해가 있는지 없는지가 승패를 좌우하는 것 같다고 말이죠. 자기 이해가 있는 친구들은 일을 하든 놀이를 하든 큰 문제가 안 생겨요. 주변에 망가진 사람들 대부분이 그게 부족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도 20대 내내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쏟았고, 30대에 자기 이해를 내용으로 대표작을 연재하기도 했죠.
AI가 산업 전반에 빠르게 적용되고 있어요. 변곡점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교육 현장에서도 변화를 체감하는 부분이 있나요?
어느 업계든 마찬가지겠지만 신인이나 전공생에게 대체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은 상당해요. 웹툰을 창작하는 공정에서 어떤 부분이 대체되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어요. 어시스턴트 중심의 세세한 공정들은 이미 AI가 상당 부분 처리하고 있죠.
어떻게 사용해야 현명한지에 대한 합의나 기준이 없기 때문에 혼란한 시기예요. AI를 활용해 그린 게 눈에 보이면 댓글에 비판이 쏟아지거든요. 그런데 작가가 스토리를 짜는 과정에서 AI와 대화를 나눠봤다고 하면 그런 건 문제 삼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일단 개인 작업에서만 활용해보라고 권하고 있어요. 일에 적용하는 건 글로벌 기준이 형성된 이후도 늦지 않으니까요.
최근, 그냥 쉬었음 청년이 120만 명을 넘었다는 통계가 나왔어요. 실력이나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서’ ‘나만 뒤쳐진 것 같아서’ 스스로 멈춰 서 있는 청년들이 많다고 해요.
그 말은 습작이나 어설픈 결과물을 내는 게 무섭다는 거잖아요. 처음은 누구나 부족하고, 그건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왜 유독 지금의 청년들이 더 크게 무서움을 느낄까요? 저는 재기의 기회를 주지 않는 사회가 이런 공포감을 키웠다고 생각해요. 이 사회가 나에게 다음 기회를 줄 거라는 기대가 없는 거죠.
우리는 고등학교 때까지 취향에 대한 탐구나 자기 이해에 대한 훈련을 해본 적이 없다가, 성인이 되고 갑자기 이 모든 고민들을 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어요. 아직 본인의 능력을 제대로 검증해보지도 못했는데, 대체 가능성은 높아지고 타인과 경쟁도 해야 하죠. 그래도 최근에는 20대가 본인의 취향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삶의 키를 주도적으로 잡으려는 모습을 많이 보여요. 굉장하다고 생각해요.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의 길을 가기 위한 마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무엇이든 나를 대표할 수 있는 결과물이나 성취의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하고 나면 불안이 많이 나아져요. 그래서 일단 시작하라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제 경우에는 조건문이 붙지 않는 관계를 많이 만들어 놓은 게 도움이 됐어요.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저 친구는 예쁘니까, 능력이 있으니까 친해져야지’라는 조건이 붙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게 명확하지 않은, 정이 들어서 소중해진 관계가 한두 명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때론 그런 친구들 속으로 도망가기도 하고, 불안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으면 그들이 저를 빼내 주기도 해요.
작가님은 불안하고 흔들리던 시기를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플랫폼과 시장, 독자, 담당자로부터 선택을 받아야 하는 지망생 때가 가장 흔들리던 시기였어요. 반복되는 거절의 경험을 하며 많이 괴로웠죠. 이 때, 제가 비전공자로 독학을 하며 얻은 경험이 도움이 됐어요. 인풋이 쌓여 아웃풋으로 발현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지금의 공부가 언젠가 반드시 쓰일 거라는 믿음도 생겼고요. 당장 성장이 눈에 보이고 성과가 드러나지 않아도 하루하루 반복해서 노력한 것들이 믿음을 강하게 만들어주고, 두려움 관리에 도움을 줬어요.
데뷔를 하고 나서는 흔들릴 때마다 이 일을 시작한 원점으로 저를 데리고 가요. 어떤 작품을 보고 감동해서 “나도 저런 작품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라고 생각했던 때, “나도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주는 작품 한 번 만들어보겠다”고 생각했던 때를 생각하면 마음을 다잡게 돼요.
작가님을 성장하게 만든 아이템은 무엇인가요? 그 아이템을 선택하신 이유도 궁금해요.
저는 성장 아이템으로 흑역사 아이템을 가져왔어요. 펜대를 잘라서 만든 펜총 목걸이입니다. 이게 뭐냐면, 제가 처음 데뷔를 하고 드디어 꿈꾸던 만화가가 되었잖아요. 주변의 친구들이야 20대 후반의 신인 만화가 이종범을 축하해주지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지는 못하거든요. 칭찬받고 싶은, 인정 욕구가 컸던 시기라 웹툰 작가라고 알아봐달라는 마음에 저런 이상한 목걸이를 만든 거예요.
사실은 몇 년이 지나고 나서, 제가 작가로 안정된 후에는 저 목걸이를 보면 스스로 미쳤었나 싶을 만큼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그만큼 인정받고 싶었던 거겠죠. 저런 걸 만들고 있었을 20대 후반의 저를 떠올리면 동시에 애틋한 마음도 들어요. “내가 여기 있어”라고 세상에 얘기하고 싶어 죽겠던 거예요.
앞으로도 저 목걸이는 절대 버리지 않을 거예요. 걸어놓고, 스스로 좀 꺼드럭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목걸이를 보면서 성찰하려고 합니다. 힘들어하는 전공생이 있을 때 목걸이 이야기를 해주면 빵빵 터져요. 교수님 추하다고 놀리기도 하죠. 제 흑역사를 구독자나 학생들을 위로하는 데 사용하기도 해요. 저 자신의 성장을 보여주는 아이템이기도 합니다.
아직 자기만의 이야기를 찾지 못해 불안함을 느끼는 청년들에게 작가님만의 다정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잘 관찰하면 공통점이 있는데, 그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을 사랑해요. 자기가 애정을 갖고 있어요. 모든 재미있는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사랑하거든요. 근데 자기만의 이야기를 못 찾고 있다는 말은 다르게 해석을 하면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얘기예요.
저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찾으려면 자기를 좀 애착을 가지고 아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자존감, 자기 효능감 같은 말은 이제 너무 흔하죠. 그래서 다소 피로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여전히 이것이 진리라고 생각해요.
내가 굉장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룸메이트가 있다고 생각해봐요. 룸메이트가 집에 와서 직장에서 한 실수, 혼난 이야기를 하면서 막 울고 있으면 뭐라고 말해주겠어요? 아마 토닥이면서 위로해줄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 스스로의 실수나 실패에는 이런 다정한 말을 잘 안해줘요. “나 정도면 나쁘지 않지, 괜찮지”라는 근거 없는 어떤 애착이 생기고, 나라는 주인공을 좋아해야 나만의 스토리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